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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카인과 아벨[4]/위대한 인간의 탄생[27]/창세기[42]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21 조회수431 추천수0 반대(0) 신고

카인을 낳은 하와의 마음은 산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쾌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둘째 아들을 얻은 그녀는 다른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미풍’, ‘가는 숨’을 의미하는데,
이 낱말은 흔히 ‘허무’로 번역이 된다. 아벨이 카인보다 건강하지 못해서일까?

그녀가 아벨에게 지어준 이름 속에는 출산의 고통은 물론 앞으로의 어려운 삶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서와 예언서’의 ‘코헬렛’의 주제가 연상된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암튼 아벨은 이름값대로 형 카인에 의해 헛된 죽음을 맞이한다. 
 

어느새 카인과 아벨은 부모님의 도우심으로 성장해서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었을 것이고,
낙원에서 자신들이 그분께 저지른 불순종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부모가 자신들의 죄를 자녀에게 알린다는 것도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어째든 그분의 은혜와 구원에 대해서는 이제 서로가 공유해야 할 필요는 느꼈으리라.
 

하느님을 떠난 삶은 생각해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느님 그분은 낙원 밖에서도 그들과 언제나 함께했다.
아벨이 들을 누비는 양치기의 일도 목격했을 것이고
카인이 땀 흘려 땅을 부치는 것도 도왔으리라.
약한 아벨이 강건한 양치기직을 어떻게 해서 택했는지는 모른다.
강한 이미지를 안고 태어난 카인 또한 보통의 농사꾼이 되었는지는
성경에서는 정확하게 알바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성장해서 자기들의 몫을 가지고 부모님을 도우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그리고 그들 부모는 자녀에게 하느님 흠숭과 희생 제사에 대해서 모범을 보였을 것이고 그것이 믿음의 행위임을 주지시켰을 것이다.
그런 삶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시키면서 그분의 보호아래 삶이 유지됨도 알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창세 4,3-4]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성경 어디에도 카인과 아벨의 비교는 없다.
그리고 카인의 재물과 아벨의 것과도 상관 비교도 없다.
카인이 나빠서, 카인의 재물이 아벨의 것보다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 저자는 하느님의 절대권을 강조하면서도
그분께서 카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동기는 밝히지 않으신다.
이것은 성경저자의 하느님께 대한 어떤 절대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그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절대권이자 신비가 아닐까?
우리가 '왜'라고 의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절대권은 신비이고, ‘이 신비는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하다보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닐까?'라고 여겨진다.
또, 카인의 몹시 화를 내면서 얼굴을 떨어뜨리는 그 행동의 결과 사이에는
늘 확실한 인과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카인의 재물 거절이
그의 인격거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카인에게 곧 말씀을 건네실 것이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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