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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26 조회수976 추천수1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4월 26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Jn.6,51)



제1독서 사도행전 8,26-40
복음 요한 6,44-51

며칠 전, 식사 후에 교구청에서 함께 근무하는 신부님과 근처에 있는 월미산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산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언덕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 곳이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 없이 떠났지요. 산 둘레를 한 바퀴 돌고 두 바퀴째 돌려는 순간,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함께 열심히 걷고 있는 신부님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한 바퀴 도는데 30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설마 30분을 못 참겠어?’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점점 아파옵니다. 배를 움켜잡고 걸음의 속도를 높였지요. 15분 정도 왔기 때문에, 15분 정도만 더 가면 화장실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15분 정도 걷는 그 거리가 왜 이렇게 멀게만 느끼던 지요. 화장실까지 도저히 못갈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지요. ‘한 걸음만 더 가자.’

이러한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던 발걸음이 결국 화장실까지 오게 만들었고, 아무런 일 없이 화장실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 이렇게 집중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한 걸음만 더 가자’는 지금 이 순간의 집중이 우리의 삶 안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걸음만 더 가자.’는 집중보다는 ‘다음 기회에 하자. 내일 하자.’등의 미루는 나태한 마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다고 쉽게 단정을 하고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미루는 삶은 도망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으로부터 또 기쁨으로부터 도망치는 어리석은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한 걸음만 더 가자’는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이러한 집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지요. 빵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주식이 쌀이기 때문에 빵은 간식 정도로 생각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빵은 주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빵이 없다는 것은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빵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생명 그 자체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포기할 것은 무엇이며, 절망에 빠질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살아 있는 빵이 되어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만 더’라는 마음가짐으로 힘차게 살아가십시오. 이것만이 우리의 몫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바람의 방향을 읽어서 연을 날리면 저절로 하늘을 날 듯, 마음속을 살필 줄 아는 사람만이 삶이라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가이 핀리).


사제수요모임이 있었습니다.
어제는 유승학신부로부터 청년사목에 대한 강의를 들었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HEALTH Data, 2011>
에 따르면 한국의 평균 자살률은 28.4%로 회원국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2위 헝가리의 19.8%에 비해 8.8%나 차이가 나고 회원국 평균인 11%대의 2배에 달하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는 암, 2위는 뇌혈관 질환, 3위는 심장질환, 4위는 자살이라고 합니다. 사망 원인의 큰 비중을 자살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10~30대의 경우에는 1위가 자살이라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2000년 당시 10대의 사망 원인 중에서 자살이 8위였으나 2010년에는 4위로 상승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에 외로운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고, 스스로도 이 아픔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스스로의 삶을 이렇게 정리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참 이상한 것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휴대폰이 있어서 언제든지 또 멀리 떨어져 있어도 통화가 가능합니다. 이메일이 있어서 언제든지 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문서를 송수신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있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채팅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의 제약, 거리의 제약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사람들은 더욱 더 외롭다고 합니다. 기계를 통해서는 진정한 대화와 나눔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요?

지금 내 주변에서도 외로운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기계를 통한 나눔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면서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이며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임을 계속해서 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 사회의 외로움이 하나 둘씩 사라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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