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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기본과 왜곡된 사랑의 구조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4-28 조회수400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 -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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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믿음없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신기한 표징만을 보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12제자가 아닌 나머지)들의 의문이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에 속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표징'을 추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육적인 사람은 '말씀'을 보더라도 육적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이 '말씀'을 보면 육적인 문자를 넘어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령적인 그리스도 몸의 지체'(영적인 몸)은 육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영은 생명을 준다.
인간의 육체가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영' 때문이다고 지난 번 부터 교회가르침을 기록해 왔다. 육은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게 하고 영은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게 한다고 또한 말하여 왔다. 육은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다. '말씀의 영'은 진리의 영이신 것이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1요한 5,6) 그러므로 여기서의 영은 바로 성령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신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영'은 생명을 준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예수님 당신의 말씀이 바로 '영이다'고 하셨던 것이다. 

글쓴이는 분명하게 말씀으로 말씀을 증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하는 현상은 지금 현대 이 시간에서도 반복되어 진다. '말씀'과 결합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미 자기 심판을 받은 이들이 있다. 이는 예수님 곧,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곧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말씀을 증언하여도 증언을 믿지 않는 것은 전하는 사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기 뜻에 따라 거짓된 강의에 무리를 지어 '저 무리들' 처럼 진리에 불순종하는 일에 휩쓸려 가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증언에 대하여 듣기가 거북하면 증언(말씀)을 떠나게 된다. 자기 뜻에 입맛이 맞지 않으면 '말씀의 증언'에 돌아서게 된다. 그래서 말씀에 불순종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창세기때 뱀의 메세지(강의)를 듣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같은 육체가 되는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하여 믿음이 먼저이고 다음에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자'가 먼저 되어야 하고 '준자'는 그 다음의 일인 것이 타당한 이치이다.

이런 이치(이성적 논리)를 왜곡하는 말들이 바로 '말씀'의 불순종을 야기시키는 거짓된 유혹이다 할 수 있다.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뜻에 따라 입맛에 맞는 말을 받아들이고 말씀의 증언은 듣기가 거북하다며 '정의'에서 '불의'로 떠나 버리고 만다. 다음과 같은 불의도 여전히 인간 내면 속에 계속 남아 있기도 한다.

사랑에도 기본이 있다. '사랑의 기본'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는 말씀이다. '한 사람'에게 이다. 다수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기본 그자체를 무시하고 다수를 사랑한다는 거짓말쟁이들이 세상에는 전부 다 이다. 실제로 기본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왜곡된 '사랑의 구조'가 존재해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여도 세상은 '사랑의 나라'에 이미 도달했다. 그러나 다수를 사랑해야 한다며 '하나'라는 이 '사랑의 기본'을 부정하는 온갖 거짓말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사랑이 세상에 가득차야 한다.

아닌 것이다. 왜곡된 거짓말인 것이다. '사랑의 기본'도 실천(행동)할 수 없는 사람들의 거창한 핑계일 뿐인 것이다. 작은 한가지 일도 '행동하는 사랑'을 못하면서도 다수의 거창한 사랑에 관한 거짓말을 설파하면서 '사랑의 기본' 마저 파괴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예수님과 일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말씀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왜곡된 사랑의 구조는 일대 일의 기본구조가 아닌, 양 한마리에 여러 명의 양치기가 있는 것 또한 그러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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