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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믿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01 조회수386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이스라엘에서 한 여인이 휴가 시에 한 목자가 양떼를 이끌고 가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양떼가 얕은 개울에 이르자 목자가 아무리 불러도 양떼는 무서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목자가 어린 양 한 마리를 보듬고 개울을 건넜다. 개울 건너편에서 이를 보고 있던 어미가 개울을 건너자 나머지 양떼가 따라갔다. 목자는 바로 주님이시다.
 
이집트에는 이런 우화가 있다. 하루는 나일강에서 거짓 눈물을 흘리는 악어가 한 아기를 빼앗았다. 아이를 빼앗긴 어머니는 울면서 애를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악어가 말했다.
“내가 애를 돌려줄 것인지 안 돌려줄지를 맞추기만 하면 돌려 주겠다.”
만일 “아기를 돌려주실 겁니다.”고 말하면 악어는 “아니 틀렸다.”고 말하며 잡아먹을 것이고 “당신은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고 말하면 “아니, 난 돌려주려고 했는데.”하면서 답이 틀렸으니 잡아먹겠다고 할 것이다. 결국 아이는 잡아 먹힐 것이다.
참 난처한 물음이며 억지다. 악어는 어떤 답을 하든 아기를 잡아먹을 생각인 것이다. 악어는 궤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탄에게 항상 악어와 같은 질문을 받고 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히브 11,17-19)
 
살다 보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술술 풀린다는 느낌이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라 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대신 일해주시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확신하게 되고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속수무책일 때가 더 많다. 그리하여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지만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을 해나간다. 망설여지고 조금 더뎌지기는 하지만 계속 목표를 향해 계획을 하고 일해나간다. 자신의 꿈을 믿기 때문에 참아낸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한 재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에게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장애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그 일을 끝낼 수 있을지 몰랐지만 계속해나간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사랑처럼 추상적인 단어로 진정한 의미도 모른 채 너무 쉽게 사용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단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다.
 
악어의 마음을 믿을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마음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할 때가 많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갖고 있는 믿음의 한 예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유일한 아들의 죽음을 요구하시어도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장차 이스라엘을 이끌고 갈 사람의 목숨을 왜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하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다. 그의 믿음은 그를 어둠과 죽음의 세력으로 몰아갔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믿음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말한다. 우리 역시 어떻게 해서라도 이루어야 할 일이나 사람 즉 ‘이사악’ 같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소중한 것들마저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그러한 것들이 생명과 은총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이사악이 생명을 건지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알 수 있게 된다.
 
누구에게나 아이들, 직장, 꿈, 건강과 같은 가장 귀중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에 대하여 생각했듯이 자신 앞에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그러한 것들이 반드시 있게 된다.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의 ‘이사악’에 대하여 말씀 드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사악’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라는 것을 말씀 드린다.
하느님께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자신이 자신의 ‘이사악’를 바치는 이유를 말씀 드려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이사악’ 돌려 받는다.
자신이 ‘이사악’을 바칠 수 없으면 겸손하게 그 뜻을 말씀 드려야 한다.
 
페르시아의 성인 루미가 <마스나비>에서 말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으므로
우리 모두 성자들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느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무례(無禮)한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므로
우리는 예(禮)를 갖추고 존경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무례한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지 못하고 세상 만방에 불을 지릅니다.
사거나 팔거나 말하거나 듣지도 않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사막에 있는 모세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리로 잔치 상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백성 가운데 무례한 사람들은 “마늘과 콩은 왜 없느냐?”고 투덜댔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잔치와 빵은 그 즉시 끝장나버리고
곡식을 심기 위한 삽과 수확하기 위한 낫으로
우리들이 힘들게 땅을 파서 농사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설득하시고 기도하시자
하느님께서 다시 풍성한 식탁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무례한 사람들이 예를 갖추지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식사에 초대 받은 욕심 많은 손님처럼 음식을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음식은 없어지지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영원히 주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시면서 진심으로 하느님을 존경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지도 않으면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느님의 식탁에 가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고 배은망덕한 짓을 하는 것이 됩니다.
또 거지 같은 얼굴을 하고 탐욕에 눈먼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이들이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기를 거부한 후에는 비 구름이 오지 않았습니다
(* 무슬림은 가난하지 않으면 일 년에 가용 재산의 2.5%를 기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간음(姦淫)이 끊이지 않아 역병(疫病)이 만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대에게 어둠과 슬픔이 오는 것은 그대의 뻔뻔스러움과 오만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길에서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영성(靈性)의 길을 가고 있는 진실한 사람을 등쳐먹는 노상강도이며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예를 갖추고 존경하면 하느님께서 빛이 되어주시며 천사들까지도 순수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만하면 태양이 사라지고 마귀가 교만을 드러내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월터 린(Walter Linn)이 말했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내면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은 거의 해내지 못하는 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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