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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01 조회수918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5월 1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Jn.10,27-28)



제1독서 사도행전 11,19-26
복음 요한 10,22-30


언젠가 감기 몸살로 방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원래 혼자 사는 사람에게 가장 서러울 때가 아플 때라고 하지요. 저 역시 감기 몸살로 누워 있다 보니 병간호 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전해주는 사람도 없다보니 외롭기도 또 서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 바로 위층에 사는 신부님이 떠올려 졌습니다. 그리고 제 침대 바로 밑에 사는 1층에 계신 신부님도 생각나더군요. 즉, 아파서 누워있는 순간에는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서럽다고 했는데, 사실 내 곁에 그것도 가장 가까운 1~2미터 사이인 천장과 바닥 사이로 신부님들이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왜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밖에 없다는 생각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혹시 주님과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먼저 주님과 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멀리 계신 분, 하늘에서 뒷짐 지고 우리를 바라보기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실 주님께서는 아까 말씀드린 1~2미터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멀리 계시다는 생각에, 또 내 곁에 가까이 계시지 않다는 생각에 불평불만으로만 일삼다 보니 주님도 나의 이웃도 항상 내 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주님도 또 내 이웃도 항상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매순간 체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으로 말미암아 힘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향해 우리는 어떤 말을 전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과 하나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들만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 역시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노력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야 언제나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외롭고 서럽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웃들과 함께 하느님을 진정한 마음으로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완성된 인간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무함마드).


한달에 한번 있는 동창모임이었습니다.
안식년, 공부 등으로 6명밖에 안모이네요.
저녁식사 후 찍은 송태일 신부와 빙상섭 신부.



주님의 뜻은 아무도 모릅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육을 못 받은 한 그리스 사람이 은행 경비 시험에 응시했는데 글을 몰라 떨어졌습니다. 그는 집에 와서 통곡했습니다. “주님! 저는 은행 경비도 될 수 없나요? 왜 떨어뜨리신 것입니까?” 그 뒤 그는 미국으로 이민 와서 후손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미국 월가를 주름잡는 대갑부에 이르게 되었지요.

그가 60세 생일을 맞아 성대한 파티를 열 때 수많은 하객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회장님! 자서전을 하나 내시지요.” 그 갑부가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제 이름밖에 쓸 줄을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만약 선생님이 글을 알았다면 더욱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텐데요.”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글을 알았다면 지금 은행 경비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은행 경비 시험에 붙는 것이 더 좋은 일이었을까요?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었을까요? 나중의 결과를 보았을 때, 은행 경비 시험에 떨어진 것이 더욱 더 큰 축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뜻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순간의 불평불만만을 가지고 모든 평가의 잣대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장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 어쩌면 주님의 축복을 가득히 받을 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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