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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죽옷의 의미/아벨은 왜 죽음 앞에서 저항하지 않았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07 조회수545 추천수4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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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사람이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창세 3,21-4,2 참조)

 

먼저 사람에게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기 전에 가죽 옷을 입혀 주시는 장면을

묵상해 봅시다. 이 얼마나 하느님의 슬픔인가요?

사랑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시골에서 살 때에 그 때는 닭을 직접 키워서 잡아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닭을 먹기 위해서 죽이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레위기에 속죄제물을 바치는 규정이

있는데 자세히 보시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속죄제물을 가져다가 그 제물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직접 죽이는 것입니다.

성경 공부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인데 그 제물을 죄를 지은 당사자가 직접 죽이

게 하는 이유는 다시 죄를 지를 마음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랍니다.

자신의 손으로 산 생명의 목을 따서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죄를 지으려다가도

멈추게 될 것을 예상하신 주님의 배려이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한 사람에게 가죽 옷을 입히려면 몇 마리의 동물의 목을 직접 따셔야 했겠는지?

이스라엘은 피는 생명으로 보았기에 먼저 목을 따서 그 피를 다 빼고 나서 

먹거나 한답니다. 생명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 살리시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직접 그 일을 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슬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외아드님도 그 마음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셨을 것이라 묵상해

봅니다.

 

이렇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고 죄를 지은 사람이 생명 나무 열매까지

먹으면 정말 안 되는 일입니다. 죄를 지은 상태로 영원히 살게 하실

없어서 에덴에서 추방을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헤아리기나 해 보셨는지요?

 

하느님의 그런 사랑과 배려 속에서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는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남녀의 성생활의 성스러움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 행위는 출산을

전제로 한다고 말씀하시는 묵상입니다. 잠자리를 같이 함은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기에 그렇습니다.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생명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얻어지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부의 성생활이 성스러울 수 있다고 묵상한 것입니다.

 

주석 성경은 카인과 아벨이 쌍둥이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도 아벨을 설명함에 있어서 왜 아담과 하와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다고 하시는지 궁금했었씁니다.

 

그리고 낳은 순서는 카인을 먼저 소개하지만 직업을 소개함에 있어서는 아벨을

먼저 소개합니다.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카인과 아벨의 탄생 조건, 내지는 성장 배경은 같다고

봅니다. 어른이 되기까지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기까지 부모의 보살

핌을 받는 환경은 같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서 그동안 인생 안에서 궁금했던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연 한 사람의 인생은 누구의 책임인가?

어떤 사람은 정말 굶어 죽을 만큼 가난한 환경을 살았어도 대기업을 운영하는

운영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비슷한 환경에서 어떤 사람은 죄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살면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카인과 아벨을 묵상하면서 이와 비슷한 것을 본 것입니다.

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두 아들이 보여주는 삶은 극과 극을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카인보다 힘이 없어서 아벨이 그냥 죽었을까요?

성경은 왜 아벨의 저항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을까요?

내가 살기 위해서는 결국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형 카인을 내가 먼저

죽여야 아벨은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어린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면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린양이신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벨의 선택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형 카인을 죽이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은 아벨이 형 카인을 죽였다해도 정당방위라는 말을

합니다. 

 

이상으로 묵상해 보니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하고 이끌고

가는 것이므로 자신의 인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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