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8. 사목 현장에서 만난 주님
03 눈물의 이별
'워신턴 D.C.가 내 맏아들이라면 신시내티는 애
인과 같은 곳.'
그만큼 나는 신시내티 한인 성당에 중년 사제의 열과 성을 모두 쏟
아서 아주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결과 노력한 것보다 훨씬 더 풍
성한 열매가 사제인 저에게 맺혔습니다.
불과 1년쯤 있다가 귀국할 예정이던 이곳에서 무려 6년이 지나서
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곳은 나의 복음 전파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전 미주, 캐나다, 남미까지 파견되어서 그야말로 복음 선포에
혼신의 힘을 다했던 곳입니다.
그 당시 내가 탄 비행기가 신시내티 공항 상공으로 진입할 때 나는
한참 전투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회항하는 전투 비행사의 심정이었습
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복음 기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오는 기분이
이러했을까.
마치 전투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다가 무사히 귀환해서 편히 쉴 수
있는 곳, 그러므로 전투 상황과 피정 결과를 서로 나누는 공동체, 이
모든 것을 자기들의 소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바로 신시내티
에 있었습니다.
신시내티의 한인 성당은 주님의 은혜로 내가 창설했으며, 내 모든
정열을 아낌없이 다 바친 곳이었습니다. 미주 전역의 봉사자와 피정
참가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새로운 삶의 희망
을 노래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이제 막 열매를 맺으려는 기운
이 움트고 있을 무렵, 이곳을 '떠나라'는 강력한 주님의 뜻 앞에서 나
는 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내가 낳은 공동체가 한창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고, 오히려 지난날들보다는 앞으로 더 많이
나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때 떠나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한동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1977년 7월 오랫동안 정들었던 신시내티를 떠났습니다.
"인간의 정이란 참으로 더러운 것이구나. 그 사랑 때문에 한 사제가
울고 있다니 ---."
그때 나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나는 석양에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눈
물을 흘리면서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히시고 임종하셨던
주님의 고통을 오랫동안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제로 돌아왔
고, 인디애나폴리스에 도착했습니다.
"신부님, 골롬반을 떠나야 골롬반 사제로 살 수 있어요. 수도원을
떠나세요."
시카고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아일랜드 출신의 골롬반 신부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가 말했던 화두였습니다.
"신부님, 나도 가톨릭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좋은 것, 거룩한 것을
버려야, 그리고 내가 알았던 하느님을 떠나야 비로소 더 좋으신 하느
님, 더 순수한 자아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신부님, 저는 떠나야겠습니다. 본당 일이 바빠서 지금 가보아야 하
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신부님도 떠나세요."
그러나 그 신부님은 내 말 뜻의 진의를 생각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신시내티를 떠나서 예루살렘 성서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몇 개월 동
안 공부하면서도 신시내티를 생각할 때마다 늘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은 마치 화롯가에 놓아둔 엿이나, 놀고 있는 어린애를 두고 온 어
머니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1년 후 우연한 기회에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
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란 성경말
씀은 진리였습니다. 내가 떠난 후 6개월까지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1년이 지나면서부터 성숙한 공동체로 발전의 방향을 잡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하느님
의 공동체를 섬기는 데는 한계가 있고, 하찮은 주님의 도구에 불과하
다는 것을 아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네가 가진 것은 물론이고, 너 자신마저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 될 자
격이 없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와야 한다."
"주님, 살아가면서 버릴 줄 아는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옵고, 용기와
사랑으로 자신마저 주님 대전에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