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왜 부인을 누이라고 해야만 했나? ** (스코롤 압박주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16 조회수789 추천수8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스코롤 압박주의)

 

왜 아내를 누이이라고 해야만 했을까?

 

"그라르에서 나그네 살이하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라르 임금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다."(창세 20,1ㄴ-2)

 

이사악이 그라르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 사내들이 자기 아내에

대하여 묻자, 이사악은 "내 누이요." 하고 대답하였다. 그는 '레베카가

예뻐서 이곳 사내들이 레베카 때문에 나를 죽일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내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창세 25,6-7)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부인을 누이라고 말했지만 뭔가 다르다는 것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왜 부인을 누이라고 했을까? 이 모습은 우리들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쓰셨을까? 그리고 하느님은 왜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야단치지도 않고 도와주실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한번이 아니라 두번에 걸쳐서 부인을 누이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와 이사악의 부인인

레베카가 그 이후 보여주는 삶의 형태로 보아 뭔가 다름이 있음을 찾아

보려고 많이 묵상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부인 사라에게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합니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

(창세 12,11-13)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난 존재라고 우기고 살지만 사실 목숨 앞에서는

한 없이 초라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고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어서

하느님 노릇(?)을 하고 살지만 목숨 앞에서는 한 없이 초라해지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창세 2,24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사람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우선 자신이 살고 보자고 부인을 누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누가 이 모습을 보였습니까? 바로 베드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베드로를 모델로 제시하시며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그렇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심을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육신의 죽음은 두려워

하면서도 영적인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에는

육신이 죽는다고 알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뭔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저는 이렇게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죽이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살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

 

우리는 어렴풋이라도 하느님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뭔가 잘못했다고

바로 벌을 주시거나 목숨을 거둬가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고 있지 않는지요?

그 사실을 아담과 하와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선악과를 따 먹은 후)

이 물리적으로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우리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죽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면 분명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결말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그것을 따 먹고(계명을

어김)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계명을 어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물리적인 죽음은 두려워해서 거짓말이라도 해서 살려고 몸부림

치지만 영적인 죽음은 그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닐런지요? 영적인 죽음이 물리적인 죽음만큼 두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그렇게 쉽게 선악과(계명)을 따 먹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므로 교회를 통하여 고해성사까지 제정해 주신

그 사랑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아마 우리는 거의 매일 선악과를

먹고(계명을 어김)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그 죽음이 물리적인 육체의 죽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죽는다와 죽을 것이다는 시간차가 있다고 봅니다.

죽기는 죽되 좀 있다가 죽는 죽음, 심판 받고 치루게 될 그 죽음인 영의

죽음을 말씀하심을 깨달았을 것이라는 묵상입니다.

 

이상으로 묵상을 정리해 보면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브라함, 이사악,

베드로 사도가 두려워 했던 육체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두려운 죽음 앞에서 아무리 하느님이 한 몸이라고 하셨다 해도

우선
살고 봐야지요. 그렇듯이 사람은 자기가 살자고 자신과 한 몸을

이루는 부인조차 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모습과 대비(對比)되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상의 수난하심과 죽으심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과 한 몸을 이루는

부인보다 자신의 목숨을 먼저 챙기는 그런 존재인데 예수님과 사람은 어떤

관계입니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닙니까?

 

그러니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한 몸인 부인을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 몰라라 부인하는 본질이

가지고 있으니 창조주가 창조물을 사랑해서 죽으심을 어찌 이해할 수

있으리까? 이것이 사람의 한계임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이스라엘에게서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당시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그 밖의 남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습니까? 거의 하느님처럼 살고 있지 않았습니까?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세분화시킨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라고 심판하고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는지요?

 

그렇게 잘난 척 하고 사는 남자지만 결국 목숨 앞에서는 어디까지 나약해

질 수 있는지 그 본질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묵상해 봅니다. 이건 물론

남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경우에 다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자신의 본질을 알았기에 사전에 부인에게

설명을 했습니다(창세 12,11-13 참조). 아브라함의 설명을 들은 사라도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은 존재임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첫 번째 일이고, 두 번째 사건(창세 25,6-7)에서는 다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번 겪어봤거든요.

그리고 주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지도 이미 알았으니 뭔 걱정을

하겠는지요?

 

이러한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던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본질을 알았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요?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다."
(창세 23,2ㄴ)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살면서 말로 표현하지

못한 미안함을 사라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슬퍼한
것은 아닐런지요?

 

그런데 이사악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사악의 경우는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레베카에게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사악의 경우는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이사악은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한다고 그랬다 치더라도

그래서 아들을 죽여야 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

해도 이사악은 어땠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자신을 묶어 올려 놓았

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었다는 것으로

보아 죽여서 태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으니까요.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 22,2)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을 들어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창세 22,9-10)

 

이사악은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요? 무엇이 그를 그렇게 하게 만들었을까요?

아무런 저항도 없었지만 이사악의 속 마음은 어땠을까요?

자신의 죽음 앞에서 느꼈던 그 죽음의 공포가 상상이나 되십니까?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다더니 제단을

다 쌓고 자신을 묶는 아버지, 꽁꽁 묶여 제단의 장작 위에 누워서

아버지가 치켜든 날카로운 칼을 보며 느꼈던 그 죽음의 공포가 상상이

되시는지요?

 

결국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이사악의 마음엔 죽음에 대한 

그 때의 공포가 상처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충격으로 받은 상처는 그것이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되어 그

상처가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게 되지만 살다가 그와 비슷한 상황이 오면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에 의해 자신이 그런 반응을 하는지조차 대부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사악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이사악은 부모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를 낳지 못하던 노부부가 어떻게 얻은 아들인지.

 

이 사랑 때문에 이사악은 아버지의 행위 앞에서 저항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마치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않으셨다면 과연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런데 사람은 그 사랑으로도 잘 치유되지 않는 것이 상처인 모양입니다.

사람이 상처를 내려 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묵상하게 됩니다.

사람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사랑만으로 모두 가능한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이담에 요셉의 이야기에서 보면 상처의 치유에 하느님의

개입이 있어야 가능해지더군요.

 

아무튼 이사악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수 없이 많은 날들에서

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들을 수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야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덕분에 성경이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문서화 된 사실을 아시지

않는지요?

 

아버지가 엄마 사라를 누이라고 했던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보통 아버지의 실수를 보면서 아들은 이렇게 결심한답니다.

"난 절대로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을테야!"

그랬을 이사악이 어째서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그곳 사내들이 아내에 대하여 묻자, 바로 "내 누이요."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죽일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생각만 들어도 이사악은

그냥 공포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우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죠.

 

뒤이어 나오는 아비멜렉이 하는 말로 보아 결코 아비멜렉은 남의 아내를

빼앗거나 남의 아내를 빼앗고 죽일 사람은 아니었습니다.(창세 26,10 참조)

이사악의 경우에 나오는 아비멜렉은 하느님이 꿈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두려워했던 아비멜렉도 정말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탐났다면

하느님께서 꿈에 나타나 그렇게 말씀하셨다 해도 듣지 않고 사라를 부인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인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적어도 두 아비멜렉은 자연법(양심)을 따라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이사악이 두려워 했던 아비멜렉은 꿈에 하느님이 나타나시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무엇을 따라서 살았을까요?

자신의 본질(인간의 약함)과 자신의 상처의 경험을 따라 생각했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단 한마디도

왜 거짓말을 하냐고 꾸중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아, 이사악과 레베카의 부부 관계가 엇나간 이유를 묵상하려다 놓쳤습니다.

 

이사악은 에사우를 더 많이 사랑했고, 레베카는 야곱을 더 많이

사랑하며 편애했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부부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갈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로 생긴 공포는 본인도 모르지만 상대방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기에 그렇습니다.

 

사라가 만약 이사악의 죽음의 그 공포를 이해했다면 어땠을까요?

성경은 이것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본래 사람은 그렇게 죽음(물리적) 앞에서 나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사악의 경우처럼 살아가면서 사람은 어떤 경험에 의해서 죽음의

공포를 체험하게 되므로 그것으로 인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그런 본질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씀

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보라고 하시는 것임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부부가, 내 이웃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들을

수 없이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니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것을 먼저 속상해 하며 상처 받지 말고 그 사람의 그간

살아 온 삶의 모습을 진실하게 보라고, 그러면 이해할 수 있을꺼라고

혹시 그걸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아닐런지요?

 

저의 경험에 의하면 저는 부모님이 저에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많이 미워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 그분들이 가해자인줄 알았더니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듯 나의

부모님도 역시 피해자였음을 본 것입니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살기 시작하면서 모든 문제가 생긴 것입

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지 않은 결과로 하느님과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살면서 창세기가 보여주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더욱 벌어지고

결국 회복 불가능한 상태까지 간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질을 다 버리시고 오셨지요.

 

아무튼 이사악의 경우 그 사건 이후 부부가 한 번도 일치를 이루고 살지

못했습니다. 무슨 사연이든 레베카는 이사악과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한 레베카가 죽기는 했는데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성경은 침묵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제가 전에 묵상을 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보니까, 사랑하는 마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앞서면 무조건

그 사람과 반대 방향에 서게 되는 마음보가 있더군요. 그래서 이사악과

레베카의 부부 관계가 좋지 않았다고 묵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묵상하라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실감나게 묵상하기

어려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느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하신 사람으로

사셨다고 알려줘도 그 이해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사악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통과 성부 하느님의

고통을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아버지)의 심정을 묵상하는

것이 하느님(성부)의 심정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왜냐 우리가 그렇게 아버지로 아들을 낳고 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이사악의 경우를 묵상해 보면 예수님의 심정이 조금 더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바로 나의 입장(이사악)에서 볼 수

있기에 더 실감나게 묵상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창세기를 열심히 묵상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셔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묵상한 내용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