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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늘을 내려주시어.../ 고 민요셉신부 * (펌)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16 조회수615 추천수5 반대(0) 신고

 

주: 최근 불교계의 이른바 도박 스님, 룸살롱 스님 사건등으로 '스님' 대신 '스놈'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스스로를 잘 성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고 민요셉신부님의 묵상글을 올려봅니다...


                                  하늘을 내려주시어 / 민요셉신부 

 

혼자 / 헤르만 헤세

 

地上에는

거리도 많고 길도 많지만

이어 닿는 곳은

모두 다 같다.

 

둘이서 혹은 셋이서

말을 타고 갈 수 있고 차로 갈 수도 있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그러기에 온갖 어려움을

혼자서 겪는 일보다

더 나은 知慧나

능력은 없다.


(부산 동명불원에서 설법중인 민요셉신부)

 

 

  About - Face !

  함께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언제나 혼자입니다. 누구나 혼자서 분투하고 혼자 고독합니다. 그것은 마치 고민하는 야곱이 야뽁강에서 혼자 하느님과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철저히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시 <혼자>를 묵상하면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뻐합니다. 불자들은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성불합시다!"라고 인사합니다. 成佛이라? 佛을 이루자, 즉 부처가 되라는 말씀으로 알아듣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성불하는 것일까요?

   불기 2544년, 음력으로 사월 초파일인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나는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에 초대를 받아 동명불원으로 향하였습니다. 우주만물에 꽉 찬 봄기운이 오시는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달아놓은 다채로운 연등이 사람 사는 마을 구석구석마다 봄을 한층 더 넉넉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축! 부처님 오신날, 날마다 좋은 인연되소서!'라고 쓰여진 리본을 가슴에 달고 행사장인 대웅전에 들었습니다. 주지이신 장산 스님의 헌공 예불을 시작으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행사 도중 갑자기 불이 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마이크가 작동 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행사가 중지되었습니다. 진행요원들은 어쩔 줄 몰라했고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습니다. 룸비니합창단이 찬불가를 노래하며 어색함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게 무슨 조화람. 그것도 하필이면 부처님 오신 이 뜻깊은 날에…. 그 와중에 '그래 맞아, 불(佛)이 나간 것이야. 부처님이 사라지신 것이야'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20여 분이 흘렀을까 다시 불이 들어왔습니다. 불(佛)이 나갔다가 불(佛)이 들어 온 것입니다. 부처님이 사라지셨다가 부처님이 다시 돌아오신 것입니다. 왜 부처님은 그 좋은 날 식순에도 없는 20분간이라는 정적의 시간을 마련하셨을까? 어떤 의미가 있을 텐데….

   이어지는 장산 스님의 법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불(佛)이 나간 사건은 스님의 법어 내용을 미리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나가 다 밝은 빛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큰 빛이 깃들어 있음을 보십시오.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나 이외의 곳에서는 부처님도 하느님도 공자님도 노자님도 찾지 못합니다. 내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자비도 사랑도 인자도 모두 내 안에 가득하게 차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 인자가 있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거늘 봉축법요식에 참석한 대중들의 마음에 있어야 할 자비며 사랑 인자가 없어 부처님이 거할 공간이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불(佛)이 나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20분이라는 불이 나간 정적의 시간은 대중들의 마음에 빛이 없음을, 자비와 사랑 인자가 없음을 깨닫게 하려고 부처님 손수 특별히 마련한 식순이었던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산 스님은 "자비와 사랑 인자 그것은 써도써도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쓰면 부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불하십시오"라고 역설했는지 모릅니다.

   이어 내가 경축사를 하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나는 장산 스님의 내용에 이어 불자들에게 <삼팔선 너머 만다라의 세계로>라는 주제의 법문을 설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합니다. 이외수 선생님은 장편소설 『황금비늘』에서 의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쁜 놈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사람들 모두가 나 뿐인 놈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절로 나쁜 놈은 생기지 않게 되지.

나 뿐인 놈이라니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나 뿐인 놈'이라고 하지...

   결국 '나 뿐인 놈'이라는 말이 변해서 '나쁜 놈'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께서 나를 지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인간이 힘들고 괴로운 것은 넓게 보지 않는 이기심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며 오직 나와 내 것을 만들겠다는 환상에 운명을 걸기 때문이니 결국 나를 비울 때 인간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나쁜 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에게 집착하는 나 뿐인 놈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강원도 양양군 주문진과 양양 사이에 있는 38선 휴게실 입구에 '여기는 38도선'이라고 새겨진 바윗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인제군 인제 원통에서 점봉산 길목에, 그리고 고성군 진부에서 간성 가는 길에서 산길로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닿는 건봉사 가는 길목에도 '38선'이라 새겨진 푯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38선은 눈으로 보여지는 38선 푯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 김남주 선생은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고 … 도적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을 두른 부자들의 담벼락에도 있고 … 감옥의 담에도 있고 침묵의 벽, 그대 가슴에도 있다"라고 외쳤습니다.

   한 편의 그림을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쪽으로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은 그들과는 다른 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를 파격(破格)이라 합니다. 파격적인 삶을 말합니다. 파격적인 살이란 다름 아닌 부와 물질적 이득보다는 영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삶을 일컫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동반의식, 측은지심, 예의, 온화, 단순함을 지니는 삶을 말합니다. 틀에 박힌 삶이 아닌, 획일적인 삶이 아닌, 경계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닌 차원이 다른 삶, 또 다른 세상을 사는 삶을 말합니다. 미움 · 모욕 · 불화 · 오류 · 의혹 · 절망 · 어둠 · 슬픔의 죽음의 문화, 죽임의 문화가 아니라 사랑 · 인내 · 화목 · 진리 · 믿음 · 희망 · 광명 · 기쁨의 생명의 문화, 살림의 문화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파격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경계를 따라 살고 싶지도 않고, 억지로 경계를 만들면서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 뿐인 놈, 나쁜 놈, 도둑놈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물금(勿禁)을 살고 싶습니다. 평화를 살고 싶습니다. 만다라를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성불하고 싶습니다. 성불합시다!

  1997년 11월 28일 금요일. 전라도 땅 승주, 송광사를 찾았습니다. 송광사는 조계산을 끼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승보사찰입니다. 종무소를 찾아 도담 스님을 물으니 외인출입금지 라고 적혀 있는 사찰로 안내해 주십니다. 한겨울을 지낼 김장을 하느라 부산을 떠는 스님들을 지나 큰스님이신 현고 주지 스님이 머무는 토방으로 들어섭니다. 안내한 스님이 안채를 향하여, "스님, 스님" 하고 부르니 미닫이문을 열고 나오는 폼이 영락없는 도담 스님입니다. 주지 스님의 시자(비서) 소임을 받은 스님을 뵙는 마음이 속세의 연을 떨구지 못한지라 매우 반가웠습니다.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그날 따라 삭발례가 있은 지라 삭발한 스님의 머리가 푸르스름한 녹이 끼어 있는 동경인 듯 송광사 풍경이 그대로 들어 앉아 있었습니다. 승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스님은 덥석 그 크신 손으로 악수를 해 오셨습니다. 방으로 안내한 스님은 먼저 다기를 준비하며 물을 끓이십니다. "오늘따라 삭발례를 한 탓에 먹을 것이 많지요" 말씀하시며 조청에 찍어 들라며 쑥떡을 내어놓고 곁들여 감, 포도 등을 가져오셨습니다.

   도담 스님과는 저는 함께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함께 살다가 저는 필리핀으로 떠났고 스님은 일광 삼덕 마을, 예수 마리아 성심 수도원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다 귀국해 보니 스님은 수도원을 떠나 또 다시 출가하셨습니다. 양로원, 평화의 집 등에서 봉사하다 다시 속세를 떠나 출가하여 스님이 되신 것입니다. 스님은 유난히 산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럴려고 그러셨는지 그렇게 좋아 하던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소식을 모르다 연이 닿았습니다. 그래 스님이 계시는 송광사를 찾았고 그렇게 다시 만난 것입니다. 코카콜라 한 병으로 세상을 정복하며 웃긴 영화 <부쉬맨>의 주인공을 빼 닮아 부쉬맨이라 불리던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고운 사람이 스님이었습니다.

   송광사 구석구석으로 화선지에 한자말로 단순하게 '下心' 이라고 쓰여진 표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下心이라? 그래 도담 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下心'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지요?"
  "예, 신부님. 불교 용어에 '불심즉하심(佛心卽下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佛心, 즉 부처님 마음은 下心이라는 뜻이지요. 下心은 말 그대로 '마음 아래'로 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심'(心), 즉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시비(是非), 즉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며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마음을 말하지요. 그러한 상태, 바람 잘 줄 모르고 언제나 야단스러운 상태를 '마음'으로 보지요. 그렇게 야단스러운 마음에 머물지 마라,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는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가라는 뜻풀이가 '下心'이지요. 마음을 비우라는 뜻으로 들으시면 고맙겠습니다."

   "下心, 즉 마음을 비워야 학습할 수 있습니다. 배울 수 있다는 말이지요. 마음을 비운 상태라야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下心, 즉 마음을 비우는 데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하근기, 중근기, 상근기가 그것입니다. 성서 말씀에 밭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에서 마른 땅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이 열매 맺지 못하고 말라 버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백 배 열매 맺듯이 가르침, 즉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下心을 살아야 합니다. 고지식하고 세상의 상식대로 살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이라면 여전히 가장 모자라는 단계인 하근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보다 좀 나아지면 중근기에 속하는 것이고, 마침내 상근기에 이르면 마음히 허허로운 下心에 살 게 되니 바로 깨닫게(覺) 되는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영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정화-조명-일치의 '세 가지 길'로 표현하는데, 이 세 가지 길을 거쳐 마침내 하느님과 하나되는,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적 성숙의 길을 말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법문에서는 下心으로 가는 길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의 출발점을 불교에서는 '下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佛心卽下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지 우리에게서 배웠고 또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보여주시고, 당신의 지름길을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진리 안을 걷게 하시고, 그 가르치심을 내려 주소서" (시편 24)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루가 21, 34).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下心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下心을 살아갑시다. 혜화동에서 살던 신학생 시절에 下心을 살지 못해 힘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참 많이도 고민하였습니다. 성서 말씀 속에서 길을 찾아 보고, 묵상과 명상 속에서도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살아야 할 길이 계시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그 때 얻었던 말씀을 <하늘을 내려주시어>라는 한 편의 시로 정리했었습니다:

하늘을 내려주시어 / 민요셉신부 

나로 하여

수도자의 길을 가게 하는 이

뜀박질해 가고픈 여러 갈래 길이

날 설레게 하는데

 

나로 하여

사제의 길을 가게 하는 이

야단스럽고 굳어져 버린 마음이

모로 드러눕는데

 

단순하여라 가난하여라 길들이며

나로 하여

작은 자의 길을 가게 하는 이

 

표적 없이 흐린 눈

울려대는 귀

감성에 익숙해진

나로 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는 이

 

아 -

하늘을 내려주시어

나로 하여

나로 일어서도록

무등 태워 주시는 이

  사람이 되는 일,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하여 도를 닦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下心을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下心을 산다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어떤 처지에서 어떤 양식의 삶을 살든 결국 나 스스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下心을 산다는 것은 나 혼자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참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 나 스스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라면, 내가 걸어가야만 할 길이라면 어쨌거나 下心을 살아야겠습니다.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헤르만 헤세의 시 <혼자>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사는 길이 성불하는 길인지 부처님 오신 날에 깊이 묵상해야겠습니다. 성불합시다. 下心합시다.

About-Face!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출처: 고 민요셉신부의 ‘하느님의 결혼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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