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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형제들
작성자송현구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19 조회수998 추천수0 반대(0) 신고

예수님의 형제들

 예수님 형제들에 대한 논쟁은 그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태 13장 55-56절과 마르 6장 3절은 예수님 형제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과연 예수님의 친형제들일까요, 아니면 사촌이나 친척들일까요?

 [예수께 형제와 자매가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다. 신앙 안에서 양육되는 가톨릭 신자는 누구나 부정적인 의미로 대답할 것이고, 반대로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성서에서 출발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는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신” 분으로 공경하는 전승에 호소할 것이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빈번하게 예수의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해 말하는 복음서들을 신뢰할 것이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반성서적인” 가톨릭 전승을 거부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 일치시기에 이러한 대조는 고통스럽고도 불유쾌한 일이다.][경향잡지, 1993년 5월호]

 이 문제를 성경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어린시절

 마태오 복음 213-15절에서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로 내려간 요셉과 그 가족은 이집트에서 몇 년을 생활하였을까요? “애굽 체류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 6개월~7년까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cafe,daum.net/rtpeace)라는 견해에 따르면 성가정의 이집트 생활은 최소한 3년 이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다시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마태 2,21) 이스라엘 땅 나자렛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집트 생활을 마치고 나자렛으로 갈 때까지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예수 밖에는 다른 아기가 없었습니다. “아기들”이라 하지 않고 “아기”라고 하는 말을 미루어 보건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루카복음 2장 40-5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도 예수님의 동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열두 살 파스카 축제 때의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 얘기가 전혀 없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은 마리아도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다”(루카 2,48ᄃ)라고만 하지 형제들 얘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모는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예수가 보이지 않았지만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루카 2, 44-45)라는 기사를 보더라도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예수 외에 다른 자녀가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50Km 정도의 거리라고 하면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예수의 부모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하룻길을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부모에게는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행동하지 않은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나자렛에서나 밖에 나와서나 친척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자렛에서 자라면서도 친척집에 자주 놀러가고, 저녁식사 때나 점심때도 친척집에서 식사를 한다거나, 혹은 또래 친척들과 어울려 밤을 지낸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연유로 비록 예루살렘에 와서도 예수는 그렇게 또래 친척들과 어울려 다녔기에,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고, 일행과 함께 어울려 예루살렘을 출발했으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예수의 형제가 없이 혼자였든지 아니면 형제들은 고향에 남겨둔 채 예루살렘에 데리고 오지 않고 예수만 데리고 왔던지 했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의 동생들이 있었다면 예수 혼자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집트 생활을 마치고 나자렛으로 갈 때까지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 외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은가?”(마태 13,55-56; 마르 6,3)라는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의 형제는 남자가 4 명이고, 누이가 최소한 2 명입니다. 이들을 모두 요셉과 마리아의 자녀로 본다면, 예수에게는 적어도 6 명의 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자렛에 정착한 후 요셉과 마리아가 자녀들을 보기 시작했다면 열두 살의 예수에게는 첫 번째 동생이 4살 터울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8세의 동생이 있을 것이고, 현실성은 없지만 그 밑으로 연년생이라면 8세~3세까지의 6 명의 동생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살 터울로 본다면 8세~0세까지 5 명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린 예수를 포함하여 6~7명의 자녀를 데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예루살렘의 파스카 축제기간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 왔을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날 놀이 공원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6~7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아빠, 엄마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12살의 예수도 그런 상황은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폈을 것입니다. 그리고 8세에서 5세 정도의 동생들은 부모를 따라 다니기보다는 그들의 형, 예수를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많은 가정에서는 형제들끼리 잘 돌보고 서로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동생들이 형을 따라 다니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대부분 경험하였던 것이기에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 고향에서 생활할 때에는 형이 동생을 잘 돌보지 않고, 자기 친구들 노는데 동생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따라 다니는 동생이 귀찮아서 몰래 떼어놓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을 간다거나, 특히 시골에 살던 가족이 서울이라든가 낯선 곳을 가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형은 동생을 잘 돌보고, 동생은 더욱 형만을 쫓아다니는 경우를 우리는 경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지혜가 충만’(루카 2,40)하고, ‘부모에게 순종’(루카 2,51)하였던 예수님은 부모님을 위해서 동생들을 더 잘 돌보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동생들도 예수를 끝까지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혼자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설혹 동생들이 형을 따라가지 않고 부모 곁에 있었다 하더라도 ‘하룻길을’ 가도록 예수의 행방을 모르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예로서, 예수의 부모는 예수만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고 예수의 동생들은 고향에 모두 두고 왔을까요? 그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친척과 친지들”(루카 2,44)도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는데 그 많은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가족은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 이 3 명이 전부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2.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루카 3,23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고, 고향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 6장 3절과 마태 13장 55절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네 명이고, 누이가 최소한 두 명 이상입니다. 사도행전과 서간에서도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한 얘기가 거론 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남자 형제들의 이름은 “야고보, 유다, 요셉, 시몬”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사에는 “야고보(작은 야고보)와 요셉”(마태 27,56; 마르 15,40)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야고보와 요셉’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이름이 같은데, 이들은 예수님의 형제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마르코 복음은 ‘작은(younger) 야고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교급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누군가 비교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마태 27장 56절과 마르 15장 40절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이 예수님의 형제들이며,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어느 목사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같은 이름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숨지시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서 거론되는 “야고보와 요셉”은 이름이 같을 뿐이지 예수님의 형제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고보, 요한, 유다, 시몬 등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와 요셉”이라는 이름이 같다고 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들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야고보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

열두 사도 가운데 야고보라는 이름을 지닌 사도는 둘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 야고보를 큰(大) 야고보라고 부르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작은(小) 야고보라고 부르지요.”(굿뉴스)

성경에는 요한의 형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같은 인물로 보는 가톨릭의 견해와 주님의 형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별도의 인물로 보는 프로테스탄트의 견해가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고보가 세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다른 사도들 보다 특별하게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나 ‘거룩한 변모’의 기사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형 야고보는 헤로데에 의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사도 12,2) 이때는 바오로가 아직 회심하기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야고보는 베드로가 말하는 ‘야고보’(사도 12,17)와 사도행전 15장에 등장하는 ‘야고보’,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갈라 1,19) 등이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사도행전 15장이나 갈라 2장 9절에 등장하는 야고보를 주님의 동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친동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야고보’는 오히려 열두 사도 중의 한사람이 아니었을까요? 바오로 사도는 서간에서 “그 때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갈라 1,19. 공동번역)라고 하는데,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사도들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동생 야고보가 사도들 중의 한 명이 아니었다면 “주님의 동생 야고보 외에 사도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기둥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파와 요한”(갈라 2,9. 공동번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보듯이 ‘야고보’는 열두 사도들 중의 한 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에 등장하는 야고보는 여러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동생 야고보’이며 동시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서 한 인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 27)

 요한복음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친형제들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겼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최소한 여섯 명의 자녀가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아타나시오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예수의 친형제들이었다면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왜 제자에게 맡겼겠느냐고 반문한다. “만일 마리아가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면 구세주께서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구세주를 낳으신 다음에도 여전히 동정이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어머니가 되셨다.”⏌(마리아론, 조규만 신부)라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는 형제들이 최소한 여섯 명 이상이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친형제라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만 친형제들이 아니라는 기록도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형제들’이 과연 친형제들인지 아닌지 단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음의 예를 통하여 그 결론에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1) 요셉과 마라아가 나자렛에 정착하여 자녀를 갖기 시작했을 경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동생들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 생활을 마치고 나자렛에 정착하여 자녀를 보았다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첫 동생의 나이 차이는 최소한 네 살 정도는 되었을 것이고, 첫 번째 동생은 29세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연년생으로 보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두 살 터울로 계산한다면 29~19세까지 여섯 명의 동생들이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마리아의 나이는 50세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결혼’(1코린 9,5)을 했다고 말합니다. 결혼한 예수님의 형제들이 자녀를 가졌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처럼 산아제한이나 인공피임도 없었을 것이므로 당연히 자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큰 동생을 29세 정도로 본다면 그의 자녀는 큰 아이가 열두 살 정도 되었겠지요. 그리고 마리아의 5~6 명의 자녀들이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았다면, 마리아에게는 12세 이하의 손자, 손녀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리아의 자녀들 중 19세의 자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리아와 그 자녀들은 ‘같은 고을’(마르 6,3; 마태 13,55)에서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그 자녀들은 거의 함께 생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손자, 손녀들도 마리아와 함께 생활했을 것이고, 마리아의 어린 손자, 손녀들은 마리아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1960년대나 70년대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시골에서는 대가족 제도가 유지되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을 돌보았으며, 아이들도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따랐습니다. 2000년 전 나자렛에서도 그런 삶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섯 명의 자녀와 그들로부터 태어난 손자, 손녀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을 다 버려두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녀가 있었다면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2)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동생들이 없었고 그 이후에 동생들이 태어났을 경우

 성경은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그리고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루카 2,5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형제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이 열두 살 때까지는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가족의 전부였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없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친형제들이었다면, 예수님의 나이 열두 살 때, 예루살렘 파스카 축제를 마치고 고향 나자렛에 돌아온 이후부터 예수님의 동생들이 태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제일 큰 동생이 예수님과 최소한 열두 살의 터울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여기서도 그 아래 동생들을 두 살 터울로 계산한다면, 21세에서 11세까지의 동생들이 있겠지요. 예수님의 시대에 조혼이 결혼 풍습이라고 할 때 21세에서 17세까지는 결혼을 했을 것으로 봐도 무난할 것입니다. 그리고 15세에서 11세까지 3명의 동생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아직 어린 나이의 동생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마리아에게는 아직은 당신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어린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당신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떠나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셨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요.

마무리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형제들이(요한 7,5),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사도 1,14)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었다면 당연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현대처럼 산업화로 인한 핵가족화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대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을 텐데 더욱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순명하며 사셨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자란 아이들인데 그 심성이 결코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한 고을에 같이 살아왔던 자녀들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가 모시게 했다면 얼마나 큰 불효가 되겠습니까? 더욱이 프로테스탄트의 주장대로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가 주님의 친형제였다면, 자기 어머니도 모시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형제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장차 예수님을 만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사는 크리스찬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던지 그 책임도 우리 스스로 져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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