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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창세기의 가죽옷과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의 의미? **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25 조회수413 추천수4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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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은 미처 쓰여지지 않은 성경을 쓰는 것이다."

   ㅡ 대 그리고리오 1세 ㅡ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5-27)

 

이 장면을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교회 공동체적인 입장에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지상생활의 마지막에 당신의 어머니를 '여인이시여'라고

하시며 왜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셨을까? 함께 있던 여인들도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을 다 걸고 당신을 따라 다녔던 여인들로서 당신이

죽으시고 나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여인들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 여인들도 함께 돌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이 장면은 다른 각도에서 묵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먼저 어머니를 '여인이시여' 라고 부르신 것에 대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왜 어머니를 여인이시라고 부르셨을까?

이 묵상 중에 떠오른 대목이 루카복음에서 엘리사벳을 만나셨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치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저는 이 텍스트와 복음서가 전해주는 성모님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묵상해 보았습니다.

왜 꼭 여인들 가운데서 복되시다고 하셨을까?

그냥 사람(인간)들 가운데에서 복되다 하시면 안 되었을까?

그렇다면 오히려 모든 사람들보다 복되신 분이되시고 더 영광스럽지 않으

셨을까? 어떤 의도가 있으셨을까?

 

그간 성경을 공부해 온 내용으로 이해하면 창세기의 하와가 저지른 불충을 

순명으로 회복시키신 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여인이라는 호칭을 부여하신 것은 아닐까하고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향에서의 묵상은 성모님도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라는 

묵상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 살아 생전에 당신이 

가르치신 말씀을 얼마나 이해했다고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가요?

정말 마지막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예수님이 정말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었던 제자들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인데요.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묵상을 통해서 성모님의 믿음의 깊이를 조금 들여다 

보았습니다. 성모님은 어떤 분이신가?

 

루카복음사가가 전하는 성모님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 28-29 참조)

 

왜 마리아가 놀랐으며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해야 했을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신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의 신관은 신과 인간이 함께 있는 신관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여기 세상이라는 곳에 살고 신은 저기 하늘이라는 곳에 사십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천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신관을 가지고 살던 시대에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을.

그렇지만 이해하시려고 곰곰이 생각하셨다고 하십니다. 

성모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성모님은 당신이 당장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들은 가슴에 

새기는 분이시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왔던 목자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신 

성모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에 놀라워하면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

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다고 합니다.(루카 2,19 참조)

 

다음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시메온을 통해  아기 예수님과

당신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도 놀라워하시며 여기에는 직접 마음

속에 
간직하셨다는 말씀은 기록하지 않으셨으나 그 엄청난 예언의 말씀들을 

가슴에 새기지 않으셨을리가 없으십니다. 무엇보다도 아기 예수님과 당신의

앞날에 대한 말씀이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루카 2,25-39 참조)

 

다음은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예수님을 잃으셨다가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신 두 분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텍스트에도 직접적으로 가슴에 새겼다는 말씀은 없으나 처음부터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들은 모두 가슴에 새기셨던 분이시므로 성경에 쓰여

있지 않다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부터 줄곧 성모님은 모든 것들을 가슴에

새기시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살아가며 한 가지씩 하느님께서 깨닫도록 도와주시지 않으셨겠는지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33년 이 세월 동안 저는 어쩌면 완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다른 제자들과 비교할 때 성모님과

같은 으뜸 제자는 없었을것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이러한 묵상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여인이시여' 라고 부르시며 제자에게 어머니로

모시라고 하시는 뜻을 이렇게 묵상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지

않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엘리사벳이 고백하는 여인중에 복되신 그

여인으로 그렇게 모셨을지도 모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사건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셨으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

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요한 2,1-5)

 

이 텍스트를 곰곰이 묵상해 보면 성모님의 그동안의 일생은 묵상의

삶이었을 것이고, 묵상을 넘어 관상의 삶이었을 것이라고 묵상해 봅니다.

당신의 아드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지 못하셨다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을 것이고, 일꾼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겠는지요?

 

우리의 성인들도 관상의 대가들이 계신데 성경이 전해주는 성모님을

묵상해 보면 아마 관상의 원조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신

말씀은 공동체적인 방향에서 묵상을 하면 좋을듯 합니다.

 

당신은 떠나시지만 이제 이 땅에 남아 있을 당신의 아들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씀으로 묵상해 봅니다. 당신이 누구이신지 누구보다도 잘 아셨던 어머니

께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맡기신 것은 아닌지요? 또한 사랑하는 제자는

당신이 어머니에게 순명하며 사셨듯이 제자도 어머니를 당신처럼 모시고

살면 된다고 하시는 것은 아닐런지요?

 

이제까지는 예수님 당신만이 아들이라고 믿고 사셨다면 이제부터는 당신의

제자들의 어머니로 사셔달라는 요청이시고, 당신께 하셨듯이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계시며, 사랑하는 제자는 당신이 어머니를

어떻게 모시고 살았는지 잘 알지 않느냐며 어머니 말씀에 잘 따르고

살라고 제자에게 요청하고 계시는 장면은 아닐런지요?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는 말씀은 요한의 공동

체에 모시고 사셨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참조)고 합니다.

이렇게 함께 열심히 기도하고 가리옷 유다 자리에 마티아를 뽑고 열두

사도가 채워지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성모님은 두드러지게 나오시지 않으십니다. 아마 예수님의

요청대로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보살피시는 자리에 계신 삶을 사신 것으로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또 한가지 묵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모님께 발현하셨다는 기사가 없을까?

성모님께는 진짜 나타나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저는 위에서 묵상한 것을 토대로 보았을 때 성모님께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고 묵상해 봅니다. 성경을 들여다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알아보는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이 당신의 부활을 이해하고 믿게 하시

려고 예수님이 얼마나 애쓰셨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살아계셨을 때와 똑같이 교육을 통해서 믿음을 키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공로가 아니고 주님의 선물이라는

것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당신의 부활을

믿도록 교육하실 분이 아니시라는 묵상을 한 것입니다.

이미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여주신 성모님의 믿음은 완성되었다고 저는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나타나지 않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무엇을 더 교육해서 가르쳐 드릴 것이 없으신

분이었다는 복음서의 고백은 아닐런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마다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묵상하셨던 성모님은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을 통해서 이미 다

깨달으신 분이시기에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시는 분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들도 성경 말씀을 성모님과 함께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고 봅니다. 당신이 먼저 가 보신 길이기에 확실한 안내를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묵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시며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는 하고

맺어주신 인연은 그냥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묵상해봅니다.



당신이 돌아가신 후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엄마를 잘 돌보라는 의미보다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살아야 한다는 관계의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묵상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어머니에게는 한 공동체의 어머니로서 돌보시는 역활을

사명으로 주시며, 사랑하는 제자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잘 받아 훌륭하게

성장하는 아들의 관계로 살아갈 사명을 주시는 장면을 묵상해 봅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 3,20-21)


이상으로 보면 하와라는 이름은 사람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하와라는 이름은 우리들이 지금 갖고 있는 그런 이름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

다. 성경은 하와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부르신 '여인이시어'는 창세기의 사람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부르며 그 여인이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맥락에서 이해해도 좋을 것이라 묵상해 봅니다.


에덴의 하와가 살아있는 모든것의 어머니가 된다면 하느님께 순명하신

성모님도 살아계신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하고 묵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보내시기 직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합니다. 저는 꼭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이

사람과 그의 아내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장면으로 묵상이

됩니다.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우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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