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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소서, 성령님!” - 5.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27 조회수414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2.5.27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오소서, 성령님!”

 

 

 

 

 



우리는 오늘 성령 강림대축일 새벽기도 시 우렁찬 초대 송 후렴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 와 조배 드리세.”

 


성령강림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얼로 충만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 모두 생명 충만, 사랑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정말 저절로 솟아나는 간절한 기도가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메마른 대지에 말라붙은 시냇물처럼

성령이 메말라 있어 온통 문제인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영혼의 가슴은 성령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메마르고 고달픈 삶입니다.

얼마 전 읽은 기사의 도발적 제목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돈 밝히는 목사, 색 밝히는 스님! 오 마이 갓!’

 


아, 이게 인간이자 현실입니다.

돈, 색(色), 밥, 술 등 몸의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육적인 것들이 온통 땅을 뒤 덮고 있는 현실입니다.

날로 왜소해지고 약해지는 정신이요 영혼입니다.

영혼 없는 육신들만 가득한 세상입니다.

온통 주객전도의 삶으로 많은 이들이 혼란 중에 방황입니다.



성령만이 우리의 희망이요 구원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일 때

신록으로 빛나는 영혼에 드높여 지는 인간의 존엄과 품위입니다.

 

 

 

 

 


연대의 삶이냐 혼자의 삶이냐?

 

성령은 혼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립의 혼자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혼자의 삶에서 부단히 연대의 삶으로 향해야 합니다.

인간은 애당초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혼자라는 생각은 순전히 환상이요 착각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참 소중합니다.

이 공동체를 떠나선 구원도 없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십시오.

모두 공동체와 관련된 성령임을 깨닫습니다.

오순절이 되어 사도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이 강림하여 모두를 충만케 했습니다.


성령 충만으로 불통의 공동체는 완전 소통의 공동체로 변합니다.

 


복음의 제자들 역시 함께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시어

평화와 기쁨, 성령을 선사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이 성령이 한 몸 공동체를 이루어 살 게 합니다.

기도하는 공동체 안에 살 때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아무도 이 성령에 힘입지 않고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야 성령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이걸 몰라 교만이요 자랑입니다.

진정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을 때 저절로 감사와 겸손입니다.


정말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성령께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영적(靈的)인 삶이냐 육적(肉的)인 삶이냐?

 

성령이 영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영적인 삶이나 성령 빈약할수록 육적인 삶입니다.

육적 몸의 현실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육에 노예화된 영혼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돈, 밥, 색, 술, 집 등

보이는 육적인 것들에 장악된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사탄의 시스템에 노예화된 삶은 바로 육적인 삶으로 들어납니다.

거룩한 성전이나 예배당, 사찰에 까지 침투한

육적 삶을 부추기는 사탄입니다.


날로 망가져 가는 사람의 영혼 육신입니다.

육적 삶을 따르다 보면 육과 더불어 영도 실종입니다.

영육의 분열입니다.

영혼이 살아야 육신도 삽니다.

 


성령 충만한 삶일 때 육신도 영화됩니다.

육신의 영화, 영혼의 육화도 이루어져 거룩한 영혼에 거룩한 육신입니다.


돈을, 색(色)을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진리(眞理)를 밝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래서 기도와 말씀을 통한 영성훈련입니다.

기도와 말씀의 영성훈련을 통해

성령의 활동은 활발해져 놀라운 자제력에 강해지는 영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육에 노예 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평화와 더불어 성령을 선물하신 주님이십니다.

 


“평화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을 받을 때 평화와 기쁨이요 용서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자유로운 삶이 영적 삶의 생생한 표지입니다.

 


진정 영적인 사람은 평화의 사람, 기쁨의 사람, 용서의 사람이니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한 삶이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진정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육신도 영혼에 순종합니다.

비로소 영육의 일치와 건강입니다.

 

 

 

 

 


성화(聖化)의 삶이냐 속화(俗化)의 삶이냐 ?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자유롭게 합니다.

 


속화냐 성화냐? 둘 중 하나입니다.

날로 속화되어 속물(俗物)이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통한 성화입니다.

영육의 성화와 더불어 정화요 치유의 구원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세상을 성화하지만

성령 빈약할 때 세상에 속화되는 우리들입니다.


세상을 성화해야할 수도원이, 성당이, 우리들이 세상에 속화된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 사는 길은

부단히 성령을 통한 성화의 삶뿐입니다.



성령 칠은을 통해 환히 들어나는 성화의 삶입니다.

 

지혜(슬기), 이해(깨달음, 통달), 의견(일깨움), 지식(앎), 용기(굳셈),

효경(받듦, 공경), 두려워함(경외)의 성령 칠은의 열매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성령의 아홉 열매는 또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이 모두가 성령을 통한 성화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성령에 따르지 않을 때 저절로 육의 행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등이 바로 육의 행실입니다.


속화의 삶에 따른 자업자득입니다.

 

 

 

 

 


오순절 날 한 자리에 모인 사도들은 성령 충만의 은총을 받았고

주간 첫날 함께 모여 기도한 제자들 역시 성령 충만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공동체적 존재로서 육적 삶이 아닌 영적 삶을,

속화의 삶이 아닌 성화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가득히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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