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안 된다니까, 그래!"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31 조회수689 추천수13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1 "안 된다니까, 그래!"

"안 된다니까, 그래!"
내가 대전사범학교에 다닐 때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빵집아저 시의 별명이 "안 된다니까, 그래"였다. 가난한 젊은 부부가 작은 판잣집에서 찐빵과 도넛을 만들어 파셨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며 값도 쌌기 때문에 학생들이 떼지어 몰려들곤 했었다. 다만 '외상 은 절대사절'이라는 주인아저씨의 고집이 우리를 자주 슬프게 했 다. 친구라는 것이 그랬다. 저쪽에서 빵을 샀으면 이쪽에서도 한 번 쯤 내야 하는데 나는 돈이 없어 늘 얻어먹기만 하려니까 창피하고 비굴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몇 번 회상을 시도해 보았지만 빈번 이 거절당했으며 소용이 없었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늘 하시던 대 답이 "안 된다니까, 그래!" 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저씨의 그 대답이 고마울 때도 있었다. 사실 외상을 먹는다 해도 갚을 능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만 해 도 친구들에게 인사치레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그때 동 생의 병 때문에 빚이 많았었다. 용돈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시 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내가 하도 불쌍하게 보였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송곳 하나 들어갈 틈이 없던 아저씨가 자청해서 외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날은 "펑!" 소리가 나도록 친구들에게 겁 없이 쓰면서 실컷 먹었다. 세상에 두 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외상을 먹어 본 사람은 다 경험한 일이지만, 먹을 때야 신이 나 고 재미있지만 막상 갚을 때가 되면 생돈을 버리는 것처럼 아까운 것이 또 외상이었다. 더구나 돈이 마련되지 못할 땐 주인을 피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정문이나 후문으로는 감히 다닐 엄두를 못 내고 철조망 신세를 자주 져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아저 씨와 아주머니가 학교 정문과 후문을 딱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외상 빚을 갚을 돈 마련은 항상 막연했다. 부모님이 무슨 용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에 어디서 생겨날 구멍이 없었고, 방학이면 가 끔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기도 하지만 겨우 몇 푼 타 오는 것이 고 작이었다. 그래서 조그만 철물점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돈통에서 돈을 훔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사실 청소년 시절부터 전과가 많았다. 수업시간에 남의 도 시락을 까먹는 일은 다반사였고 친구들의 콘사이스를 빼내어 팔기 도 했으며 학교의 수도꼭지도 비틀어지기만 하면 풀어다가 돈을 만들곤 했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때는 술집에서 학생과장을 만나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 학교의 선생이 었는데도 나는그처럼 구제불능이었다. 좌우간 그 뒤로 외상을 몇 번이나 더 먹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꽤 신용을 지키다가는 졸업 말기에 외상을 크게 한 번 걸어 놓고는 그대로 떼어먹고 말았다. 그때는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빵집아저씨 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놈의 외상 때문에 굽실거리고 자존 심 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것이라 해도 분이 안 풀렸을 것이다. 졸업을 하자 나는 섬마을 학교로 지원하여 충남 당진군에 있는 '대난지도' 라는 서해안의 작은 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후 학 생시절의 '외상' 문제 따위는 까맣게 잊고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때 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 리고 그때는 또 선생이 동네 유지(?)여서 가끔 정중한 초대를 받곤 했다. 마을에서 초대가 오면,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던 나로서는 돈 안 들이고 실컷 마시고 배 터지게 먹는 기회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생 신, 회갑, 돌, 제사 등이 줄을 잇고 있었으며 모내기나 추수 때 등 술 마실 일들이 많아서 그때마다 선생은 귀빈으로 초청되어 안방 에서 큰상을 대접받곤 했었다. 그때는 이장이 제일 높았으나 선생 끗발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의 내 식사 정량이 밥 두 사발에 국 세 그릇, 그리고 말걸리 한 주전자였다. 나는 매끼마다 그렇게 먹었으 며 그때의 밥 주발은 안에 담긴 것보다도 위로 올라앉은 양이 더 많았던 시대였다. 그리고 공밥이나 공술이 없는 날은 굶을 수 있는 데까지 굶으며 지냈다. 자취 쌀이 늘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섬마을 선생 3년을 하자 군에 입대하는 문제가 생겼으며 바로 그 시기부터 섬마을 선생을 우대하는 교육정책에 따라 나는 운 좋 게 대전시로 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대 전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적어도 10년은 고생을 해야 내신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전으로 발령 받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때 사범학교 정문 쪽으로는 부속초등학교가 있었고 후문 쪽 으로는 서대전초등학교가 있었다. 나는 바로 서대전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묘하게도 모교로 발령을 받아 내가 졸업할 때 계셨던 선생님들과 함께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학기 초였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끝내고 가정방문을 하는데 평 소에 유독 나를 따르던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다른 아이들의 집부터 먼저 돌고 맨 나중으로 아꼈던(?) 그 아이의 집을 찾았는데 그 아이가 "아버지!" 하고 집 으로 달려가서 끌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안 된다니까, 그래" 바로 그 아저씨였다! "워어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때 내 상황이 바로 그랬 다. 나도 당황했지만 그분은 나보다 더 당황했다. 집이 그 쪽이 아 니었는데 그동안에 아마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간신히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 외상값 안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죄송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 저도 이젠 빵 장사 안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