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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의 한가지 도구로서의 사랑 [불행한 사랑의 뿌리]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07 조회수349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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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첫째가는 계명에 대하여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는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음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며 율법 정신에 대하여 대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이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들은 바가 있어 다들 잘 알고있다 하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의미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가르침을 주시는지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떻게 사랑하느냐에 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과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다 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인간이 가르쳐 주는 사랑의 형태 보다는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사랑의 모습이 더욱 중요합니다. 인간에게서의 사랑은 모든 것들이 사랑일 수가 있으나, 하느님에게서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의 사랑'이란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입장에서 사랑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마다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랑은 인간을 불행하게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인간을 불행의 시공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실재적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 불행을 극복하여 하느님의 생명과 평화로 인간을 행복에 이르도록 지향해 간다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랑 자체가 중요하다고 설전하기 보다는 어떤 사랑의 모습인가 하는 사랑의 과정이 훨씬 중요한 측면으로써 인간에게 분명하게 인식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은 사랑을 하나의 세상 도구(관리)로 삼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은 불행에 기반해 있습니다. 이 불행한 사랑의 뿌리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극복되어 집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요한 4,7) 하고 성경은 틀림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면 인간은 결국 인간적인 사랑 안에서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사랑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은데 그 가치라는 것은 불분명하여 인간의 불행을 초래한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그런 까닭에 인간과 사랑을 도리어 파멸시키게 됩니다.

성경말씀도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1요한 4,7 - 8) 여기서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가리키며 인간이 저마다 서로 주장하고 설전을 벌릴 수 있는 불분명한 사랑의 모호한 자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에 대하여 인간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예수님께서 하느님에게서 오셨습니다.그러하니 예수님께서 바로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도 사랑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시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성체성사적인 삶이란 예수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삶을 말하며 인간이 주장하는 온갖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할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은 인간의 머리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예수님과 일치된 '아버지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사랑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결합되어져서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오신 예수님> 자신을 사람에게 '내어 주신" 사랑을 말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으로 인간은 하느님을 먼저 사랑함으로써(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이 사랑 안에서)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을 설명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25,40) 예수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하느님께 해 준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성전주의자'라고 스스로 착각한다면 그는 가식적인 율법주의자이며 바리사이들과 하등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죄를 없애는 자, 스스로 의인이다고 여기지만 하느님의 의로움에 거역하는 불의한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성전(하느님의 나라, 요한묵시록)이시며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을 성전 자체로 보며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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