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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식별과 선택/ 영에 대한 이해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09 조회수360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식별과 선택/ 영에 대한 이해(clc길벗영성강좌)

 

                        강사 : 신광식 알로시오/clc 수석연구원

 

매 순간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 갈 것인가?

성경에는 영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 전반에 걸쳐서 나옵니다.

이 영에 대한 이해를 지식의 차원에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해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과 발견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일관성이 있나요?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나 자신도 나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충동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인간 존재의 모순성에 대해서는 합의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존재가 모순된 존재라고 정의를 내릴 때에는

신앙 안에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모순된 존재로 창조하셨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사람을 보시기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모순된 존재라고 규정해 버리면 하느님은 설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 모상대로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모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인간 안에는 하나의 상황을 놓고 상반된 생각과 충동, 느낌의 차원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7장에서 이 부분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서서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생각과 충동이 나를 넘어선 원천에서 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과 충동이 다 나라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이끌어가는 생각(영적인 실체)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반된 영적인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과 하느님이 아닌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순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

니까?"(로마 7,15 이하 참조)

 

사도 바오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열정적이고 순수했으며 구원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이 일관되기를

바랬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일관된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으로

일관될 것 같았는데...

 

아, 우리 인간 너머에 우리를 이끌어 가는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우리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고 얼마나 오만했던가?

 

 

인간은 내적인 일관성을 추구합니다. 그 내적인 일관성을 어떤 행위(율법)

가지고 채워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인간은 내적인

일관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내 마음의 주인은 내가 아님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를 이끌어가는 법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곧 영의 원천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내 행위에는 그것을 하게 하는 수 많은 생각과 충동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 그 생각을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 충동, 느낌, 내적 분위기, 의식의 흐름 등 내가 행동하게 하는 

내면의 움직임들, 이것들은 감지할 수 있으나 다 나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은 원천이 있습니다. 곧 영적인 실체에서

기인합니다. 이것은 내 밖에서 오는 것으로 하느님과 관련된 것으로는

평화, 자유로움, 희망, 용기, 믿음이 커짐, 사랑 등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반대로 하느님과 관련이 없거나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편, 좌절, 실망, 불안, 두려움 등으로 우리를 휩싸이게 합니다.

 

우리가 영(spirit)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거리를 두고 통찰하게 됩니다.

영적인 실체는 바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실체는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닙니다. 바람은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듯이 영적인 실체도

그와 같습니다. 깃발을 꽃아 놓으면 이 깃발이 펼럭이는 것을 보면서 

그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지, 북쪽에서

불어 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깃발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그것이 하느님의 영이 이끄시고 계신지 

악한 영에 의해 휩쓸려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에 대한 이해를 지식의 차원에서 알아듣지 마시고 체험(경험)의 차원에서 

이해하시길 빕니다. 생각, 충동, 느낌 등을 감지(식별)하려면 정직해야

합니다. 거리를 두고 살피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느낌, 충동 등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알아듣는 수련에서 정직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내 안에서 그런 느낌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에 그런 어떤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이나 느낌, 충동이 일어나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기에 정직하게 보기를 어려워하고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보겠습니다. 

그 열매를 보고 먼저 생각이 들었습니다."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

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받아 먹었다."(창세 3,6) 

 

그런데 우리들이 그 생각을 정직하게 돌아보길 어려워하는 이유는, 우리는

잘 잘못을 평가하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 생각이 내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돌아보기를 어려워합니다. 내 존재가 평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려워

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책임은 그 생각에 휩쓸린 것부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느낌, 마음 등을 자신이 콘트롤 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식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올라오는 것이나 그런 느낌이 드는 것들에 대해서 관대해져야 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면

성장해 갈 수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변명만 늘어갈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책임을 서로에게 있다고 변명하듯이 말입니다.

 

요엘 예언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

영적인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정직하게 자신 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잘 식별하고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런 눈으로 연민 안에서 바라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이기에 이쪽으로도 휩쓸릴 수도 있고, 저쪽으로도

휩쓸릴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spirit)은 우리를 이끌어 가시지만

악한 영은 우리를 휩쓸어 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관점에서 본다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선한 영의 이끌림에 잘 이끌려 가는 사람과 악한 영에게 잘 휩쓸려 가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영에게 잘 휩쓸려 가는 사람을

향해서 연민이 일어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경험적으로 이끌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살면 인간은 휩쓸려 가는 존재입니다. 애쓰며 살면 선한 영의 이끄심에 응답

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늘 깨어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이 이냐시안만 필요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모두 정직하게 보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행위, 그때 제대로 했나? 그것만 보려고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감추는데 전전긍긍합니다.

 

내 원천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살고 싶은대로 살면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신다고 생각합니다. 이해 관계에 의해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 하느님과 그런 식으로 연결하여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와 부합하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에 비추어 내가 더 겸손해지고 있는지,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더 낮아지려고 애쓰고 있는지 곧 나누고 섬기고 비우는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나의 가난함이 드러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영적인 인간관은 영적인 세계관으로 바라보게 해 줍니다.

영적인 눈으로 냉정하게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느낌, 충동 등의 원천들을.

 

영적인 원천의 세 가지는

- 하느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느낌, 충동 등이 있습니다.

- 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오는 느낌, 충동 등이 있습니다.

-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느낌, 충동 등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통 본능이라고 합니다. 수면욕, 성욕, 식욕 등이 있습니다.

이 욕구는 생명을 지켜가기 위해 오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내 생명을

지켜가는 것 까지만. 그런데 인간은 필요이상으로 합니다.

 

그런 본능을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기도 하지만 악이 이끌어가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유전적인 기질(선천적)은 변화되기가 어렵습니다.

성품, 성정이라고 합니다. 그 기질도 하느님은 빛으로 이끄시지만 악한

영은 어둠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격은 변화될 수 있지만 유전적 기질인 성품과 성정은 변화가 어렵습니다.

그러한 본능이나 기질은 쉽게 알아 차릴 수 있기에 애쓰려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경험한 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기 어렵습

니다. 이 경험의 세계를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 경험에 가장 많이 이끌려 갑니다.

컴플렉스를 악이 가장 많이 이용합니다. 컴플렉스는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내 에너지가 쏠리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은 이런 것들을 활용

해서 이끌어 갑니다. 컴플렉스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면 식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악은 내 경험을 가지고 이끌어 갑니다. 우리의 상처 자체는 없앨 수는

없지만 화해할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런 것에 지배당하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성찰하지 않고 잘 살아가려고 하면

잘 살아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에너지입니다.

그 욕구를 하느님께서도 이끌어 가시지만 악한 영도 휩쓸어 간다는 사실

입니다.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욕구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쪽으로 끌려 가는냐에 따라 자신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것 정직하게 거리를 두고 식별하셔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내가 아님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내가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도덕성이 없습니다. 잘 잘못이 없습니다.

내가 채임질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가 내 책입입니다.

 

내가 이 충동대로 하면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를 생각하면 이 충동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됩니다. 어떤 것이든지 시작 동기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이 이끌어 가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첫마음이

사라지고 다른 것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첫 마음을 가지고 식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시작해서 내가 주인이 되고 악의 이름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그 순간에 그렇게 의심하게 하는 생각이 들까?

그 때 거의 악이 활동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그 순간에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 가족도 돌보지 못하면서...

하느님은 불안함을 통해서 이끌지 않으십니다.

용기, 힘, 위안, 평화 등을 통해서 선행과 덕행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고독은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 위안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고독기에는 새로운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 열심히 하느님과 약속하신 것 애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영적인 위안기에는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내 선행의 댓가로 주신

것도 아니고, 내가 잘 살아서 주신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선물로 노련한 길잡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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