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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사(戰士)와 중심(中心) - 6.1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13 조회수34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6.13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1195-1231) 기념일

 

1열왕18,20-39 마태5,17-19

 

 

 

 

 





전사(戰士)와 중심(中心)

 

 

 

 

 



삶은 전쟁입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연상되는 게 전사(戰士)입니다.


지난 10일(현지시간) 페루 헬기 참사로 한국인 8명을 포함하여

14명이 전원 희생되었는데 한국인 8명 모두가 사업과 관련되어

일거리를 찾아 방문하던 중 불의의 참변을 당했습니다.


그대로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사한

전사자(戰士者)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요즘 수도원 배 밭은 적과에 이어 배 봉지 싸기가 한창입니다.

온몸을 완전무장하고 날이 밝자마자 시작하여 날이 어두워질 때 까지

무려 13시간 맹렬하게 봉지를 싸는 자매들을 보면

그대로 용맹한 삶의 전사를 대하는 듯, 저절로 경외심이 듭니다.

 



오늘 1독서 열왕기 상권의 주인공, 엘리야 그대로 하느님의 전사입니다.

하느님의 전사이자 예언자인 엘리야 1명과 바알의 예언자 450명,

1:450의 대 전투입니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 혼자 남았습니다.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오십 명이나 됩니다.”

 


우리의 영적전쟁 역시 함께 해도 엘리야처럼 결국 혼자임을 깨닫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내심,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두려웠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뜻 생각난 게 골리앗과 대 혈전에 승리한 소년 다윗입니다.

다윗 역시 엘리야에 버금가는

믿음과 지혜를 겸비한 하느님의 용맹한 전사였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독서 중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 역시

불세출의 하느님의 전사였습니다.



오늘 기념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역시

그 파란만장한 삶을 보면 저절로 하느님의 전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위인들이나 교회의 성인들 예외 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전사들이였습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릴 때 집중과 안정이요,

삶의 전쟁, 영적전쟁에 백전백승, 천하무적입니다.


하느님이 몸소 배경이 되어 주시는데

누가 하느님을 대적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중심을 잡지 못해, 중심이 없어, 중심을 잃어 백전백패입니다.

 

중심을 잃어, 중심이 없어 두려움과 불안이요 불화와 분열입니다.


중심이 없어 분산되면 도저히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중심이 없어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면

그 좋은 병력도, 무기도, 전략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외적의 침입보다는

내부의 부패와 분열로 망한 나라, 망한 사회, 망한 개인이 대부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심은 두 말할 것 없이 하느님입니다.


길다싶지만

어제 읽은 ‘공허한 중심’이란 세계적 수준의 한국의 어느 인문학자의 글이

우리의 하느님 중심과 잘 연결되기에 기쁜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1차 대전 직후의 시대적 혼란을 진단하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말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있다.

중심이 완전히 공허해진 것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회의 지각 판이 계속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끄떡없이 가운데 버티면서 전체를 거머쥐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중심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른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정치 분쟁들은 이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게 한다.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중심을 가져야 사람은 자기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혼란의 시대일수록,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중심을 부여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게 마련이다.


여기에 관련된 것이 광신적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개인들을 연약한 고립으로부터 구하여

단단한 집단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중심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성원, 모든 인간의 포용과 화합을 고려하고

존재 일체에 대한 존중으로 나아가는 원리이다.

 


세계의 근본 원리에 대한 모든 깊이 있는 가르침은

그것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전한다.

 


“여기 한 가지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선가귀감)

 


이것은

종교적 명상에서나 나올 수 있는 존재의 근본에 대한 어려운 설명이다.


그러나 정치공동체를 뒷받침하는 중심도, 진정한 중심은

이데올로기나 파당성이나 광신으로 표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중심이 멀리 있는 것만이 아니다.

법이나 정치는 사회의 외면적 제도에 불과하지만,

그 밑에는 최선의 경우,

인간 존재가 규범을 통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구 있다는 전제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이나 정치가 인간적 제도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인간 존재의 규범성을 인정할 때이다.


이 규범성은 감성의 차원에서 다시 모든 것을 감싸는 삶의 전체의

신령스러움에 대한 느낌에 이어질 수 있다.

이 느낌은 일상적 삶에 스미고,


문화 그리고 학문적 사고의 바탕으로도 존재한다.-

(경향신문6.12일 31면; 김우창 칼럼, 이화여대 석좌교수)

 



영성을 몰라 감성이라 하고

주님의 현존을 몰라 신령스러운 느낌이라 하는 데

참 놀라운 깊이의 통찰입니다.


이래서 사회 지도층에 있는 이들은 깊은 종교 생활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이 말하는 중심은 그대로 우리에게 하느님이요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거짓 중심의 우상이

사람들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지요.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고 있는

하느님의 전사들이자 그리스도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중심 안에 머물러 중심을 잡고 중심을 사는

우리 분도 수도승들의 정주의 삶입니다.


수도원을 찾는 분들 역시

수도원에서 하느님 중심을 잡고 전열(戰列)을 가다듬고

전의(戰意)를 새로이 한 후

다기 삶의 전쟁터에 하느님의 전사로 출전합니다.

 


삶의 영적전쟁에 중심을 확고히 함이 우선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승리요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아무리 환경 좋고, 이론 좋고, 물자 풍부하고, 부족한 것 없어도

하느님 찾는 열정의 하느님 중심이 확고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입니다.


오합지졸이란 말도 있듯이

하느님 중심이 약화되면 많은 사람도 별로 도움이 못 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엘리야의 승리가

결국은 하느님의 승리임을 목격한 이들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승리를 목격한 이들의 하느님 중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사랑의 이중 계명에 613가지 계명이 포함되듯

하느님 중심의 ‘하나’에 모든 율법과 예언서들이 다 포함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한 뿌리에 모든 가지들이 연결되어 있듯이

하느님 중심에 모든 율법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질수록

하느님의 전사로 항구할 수 있고 저절로 완성되어 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 중심 안에 깊이 머문 우리를 당신의 능력으로 무장시키시어

당신의 전사로 삶의 영적전쟁터에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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