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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매리골드의 또 다른 이름, 부활절 꽃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19 조회수7,568 추천수0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매리골드의 또 다른 이름, 부활절 꽃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매리골드, 이름 자체가 우리말로 풀이하면 ‘성모님의 황금’인 이 꽃에 얽힌 여러 일화들을 지난해 11월호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교회에는 이 꽃과 관련해서 가슴 뭉클한 이야기 하나가 또 전해 온다. 역시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사연으로 해서 이 꽃은 다른 한편으로 ‘부활절의 꽃’이라고도 기억된다.

 

저 옛날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그 부근에서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가장 먼저 이 소식을 들었다. 인류를 구원하실 분이 아기로, 사람으로 태어나셨노라고 천사들이 알려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을 전해들은 목자들은 즉시 길을 나섰고, 어딘지도 모르는 채 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을 하늘의 별이 안내했다. 그런데 목자들의 뒤를 한 소년이 소리 없이 살짝 따라붙었다. 부모와 가족도, 돌봐주는 사람도 없는 천애고아였다. 사람들은 그 소년을 못된 아이라 단정하여 상대도 하려 하지 않았다. 실제로 소년은 손버릇이 고약한 아이였다.

 

어둠 속에서 목자들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가는 동안 소년의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목자들은 들뜬 기분으로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드릴 선물에 대해 소리 높여 말을 주고받느라 밤길을 걷는 발걸음조차도 가벼웠지만, 그 뒤를 따라가며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소년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소년들은 목자들과는 달리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기 예수님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귀엽고 예쁜 아기와 아름다운 어머니를 보고 또한 천사들의 고운 노래를 듣는 순간, 소년의 얼어붙었던 작은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기운이 용솟음치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아기에게, 그리고 아기의 어머니에게 무엇이든 드리고 싶다는,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소년의 주머니에는 목자들에게서 훔친 잡동사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은 슬픈 얼굴로 아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친 아기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얘야, 그건 안 된단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년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쌓여 있는 희고 깨끗한 눈을 긁어모아 작은 눈덩이 하나를 만들었다. 눈덩이를 아기 어머니에게 드리고는 아기에게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 고개를 드는 순간에 놀랍게도 아기 어머니의 손에서 눈덩이가 녹아내리면서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피어나는 광경을 소년은 목격했다. 눈을 비비며 보고 또 보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년과 아기 어머니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소년이 성모님께 눈덩이 선물하자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피어나

 

그 뒤, 소년은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다. 한동안은 소년 시절에 겪은 놀랍고 신비로운 일을 기억하며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생활은 점점 더 악에 물들어 갔다. 어느덧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그날 밤의 신비로운 장미꽃도, 귀부인의 모습도 모두 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는 온갖 범죄들을 저지른 끝에 체포되었고 감옥에 갇혔다. 결국에는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루는 그가 갇혀 있는 감옥 밖의 거리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을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 주시오.” 그는 영문을 모르는 채 어리둥절해하였다. ‘아니, 사람들이 왜 내 이름을 부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나를 석방하라는 걸까?’

 

그때 간수가 오더니 “바라빠, 밖으로 나와라. 널 석방한다.” 하고 말했다. “예수라는 나자렛의 목수가 너 대신에 십자가형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너 대신에 그 사람을 원했단 말이야.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어서 썩 꺼져라.”

 

뜻하지 않게 감옥에서 풀려난 바라빠는 죄수들의 처형장인 골고타 언덕으로 몰려가는 군중의 뒤를 따라갔다. 그 순간, 참으로 오랜만에 어린 시절 어느 날 밤의 광경이 떠올랐다. ‘귀엽고 예쁜 아기와 고귀한 부인이 있었지. 난 그때 그들에게 줄 선물이 없어서 눈을 한 움큼 뭉쳐서 가져다 바쳤지. 그런데 아기 어머니가 그 눈덩이를 받아들자 그것이 녹으면서 아름다운 장미꽃으로 변했어!’

 

그가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눈앞에는 십자기 형틀 세 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의 십자가 밑에 웅크려 앉은 한 부인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라빠는 깜짝 놀랐다. 바로 어렸을 적 그날 밤의 귀부인이었다. 바라빠는 숨진 아들을 품에 안고 애통해 하는 어머니 곁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바라빠의 마음은 왠지 모를 슬픔과 아픔으로 찢어지는 듯했고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흘러내렸다.

 

그는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이 부인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은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이 아닌가? 이젠 내가 저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저 사람이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을 나라도 그대로 해야겠다.”

 

 

“이 마른풀이 다시 꽃을 피운다면, 저는 제 죄들에 대해 용서를 빌겠습니다.”

 

바라빠는 용기를 내어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감히 용서를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기에는 제 죄가 너무 많으니까요.” 부인이 나지막이 대답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거예요. 이제 모든 죄는 씻겨 없어졌어요.” “하지만 제가 지은 죄들은 워낙 많고 커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큰 것은 없어요.”

 

바라빠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미끄러지면서 부인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마른풀을 뜯어 움켜쥐고서 울부짖었다. “만일 이 마른풀이 다시 꽃을 피운다면, 저는 제 죄들에 대해 용서를 빌겠습니다.” 부인이 그 풀잎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서 마른 잎은 사라졌고, 부인의 손에서는 태양처럼 빛나는 노란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긴 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구세주의 시신 앞에서 깊숙이 고개를 숙인 바라빠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과 회오를 한껏 터뜨리며 목 놓아 울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는 부활절 새벽까지 이 꽃을 당신의 옷깃에 달고 계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의 말, 곧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아요. 되살아나셨어요.”(루카 24,6)라는 말을 듣고 그동안의 온갖 슬픔과 고통을 잊으실 때까지 이 꽃을 꽂고 다니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꽃은 매리골드, 즉 ‘성모 마리아의 황금’이라 불리게 되었다. 온갖 죄악 속에서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를 받아서 영혼을 다시 꽃피우는 부활 꽃이 된 것이다(〈가톨릭 다이제스트〉 1989년 4월호 참조).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4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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