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톡톡] 개신교 신자들은 정말 성사를 인정하지 않나요? 개신교회들이 거부하는 성사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죠? 가톨릭 신자들이 볼 때 그 성사들은 전부 은총과 인간의 성화에 효과적인 표지들인데 말이죠. 게다가 가톨릭 신앙이 참된 종교라면 성사가 없는 교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나요? - 카탄자로에서 살바토레 이 물음은 아주 한참 늦게 도착한 편지, 아니 기한이 지나서 받은 편지와 같아요. 우체국의 고질적인 비효율성 때문이 아니라 변명의 여지 없는 발송인의 실수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으로 교회들 간의 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지요. 그런데 이분은 이를 알지 못하셨네요. 여기 문헌을 보면 개신교회에 어떻게 다가갈지, 그들의 신앙 교의를 어떻게 봐야할 지에 대해 정확한 지시가 나와 있는데 말이죠. 교회들 간의 더 많은 대화 우선 방법을 보죠. 공의회의 출발점은 우리 독자께서 보시듯 개신교회의 분열 요소나 부족한 점들이 아니라, 우리를 일치시키는 점, 아니 그 교회들 또는 거기서 개혁하며 나온 교회 공동체들의 현실이에요. 이러한 구분은 개신교 때문인데 그 안에 하위적으로 또 쪼개져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에게도 구원의 도구들은 있어요. 그래서 공의회의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3항은 “이 갈라진 교회들과 공동체들이 비록 결함은 있겠지만 구원의 신비 안에서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교회들과 공동체들을 구원의 수단으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죠. 여기서 하위 공동체들을 가리킨 ‘구원의 수단’이라는 구절에 주목하세요. 이는 분명 그 공동체들을 존경과 신뢰로 높이 평가한다는 초대인 거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자세가 아니라 형제적 친교라는 큰 그림 위에서 그렇게 하는 거죠. 비록 “그 수단의 힘이 가톨릭 교회에 맡겨진 충만한 은총과 진리 자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믿기는 하지만 말이죠. 신앙의 내용에 관해서 공의회는 “대화를 더욱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이 대화의 토대와 격려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할”(일치 교령 19항) 몇 가지 요점을 제시하지요. 나열하면 세 개예요. 첫째, 교회적 친교의 중심이자 원천인 그리스도께 대한(또한 삼위일체께 대한) 공통의 신앙 고백이고, 둘째, 복음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성경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사랑과 존경’이며, 끝으로, 성사 생활인데, 일치 교령 22항이 바로 이 성사 생활을 다루며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강조하고 있어요. 즉 세례성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해는 공통이고 완전하다는 점, 그리고 성체성사 또는 ‘거룩한 만찬’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고 이 만찬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는 삶을 상징한다고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사제의 성찬례 집전에 필요한 성품성사의 결여를 지적하고는, “그러므로 주님의 만찬, 다른 성사들, 예배, 교회의 직무에 관한 교리를 대화의 주제로 삼아야 한다.” 하고 끝을 맺어요. 루터가 거부한 것 성사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은총의 효과적인 표지라는 생각은 중세 시대 때(12-13세기) 생겼어요. 이 기준으로 성사 예식이 일곱 개로 고정됐지요.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은 세례와 성찬을 제외하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고 확실히 증명할 수 없는 성사 예식들에 대해서는 성사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이런 성사의 개념을 거부했어요. 성사를 객관적이자 거의 기계적인 하나의 실재로 보는 걸 거부했던 거죠. 그 대신에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서 일차적으로 본질적인 어떤 것을 보았어요. 말씀은 약속에 따라 성취되고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여지지만, 표지는 믿음을 가리키거나 알려주는 가치를 지닌, 오직 부차적인 것이라 본 거죠. 개혁 교회 공동체들 사이에 분열들이 좀 있긴 해도, 이들은 우리의 성사 예식들을 거의 다 갖고 있어요. 비록 가치와 해석의 수준이 우리와 똑같지는 않아도 말이죠. 그래서 성령의 선물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견진성사와 연결시키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세례 때 받는다고 보아요. 세례란 옛 교회 전통에 따르면 물과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거니까 맞죠. 죄의 용서도 존재해요. 이는 참회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용서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이루어지죠. 혼인에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약의 가치를 상기시켜요. 성품성사는 인정되지 않지만 말씀의 직무, 전례의 직무, 그리고 사목 직무는 알고 있어요. 이 직무는 목사가 실행하며, 목사는 공동체가 지명하고 교회 예식을 통해 세워져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성사의 의미와 숫자를 본다면, 지금 우리는 가톨릭 시각에서 분명히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러나 저 교회들에도 성사 생활이란 게 있음을 부정할 순 없어요. 다른 한편, 가톨릭 교회에서도 공의회를 통해 성사 개념의 확장이 있었지요. ‘은총의 효과적인 표지’라는 외견상 너무 좁은 정의를 극복한 거죠. 공의회 문헌들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교회 헌장 1항)이며 ‘위대하고 놀라운 성사’라고 말해요. 바로 그리스도가 원성사(原聖事)다. 이렇게 보는 거죠. 이어서 성사들은 믿음의 표지들로 제시됐고 소위 ‘말씀의 전례’ 부분을 거행하는 가운데 풍성해졌어요. 또한 성사의 내용도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집중됐으며 더 이상 그저 은총이라 하지 않았고, 성사의 교회적 차원도 정당한 평가를 받았어요. 마침내 오늘날엔 성사를 구원과 은총의 도구로 마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안정통행증으로 보지 않아요. 그보다는 오히려 구원에 참여하여 성장하는 의미를 지닌 상징적 행위로 보아요. 즉,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인도하고 완성에 이르기까지 걸어갈 은총을 주는 것, 여기에 성사의 뜻이 있죠. (R. Falsini, La liturgia. Risposta alle domande più provocatorie, San Paolo, Cinisello Balsamo 1998, 73-76)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봄(Vol. 45), 번역 최종근 파코미오 원장수사(성 베네딕도회 남양주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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