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2 가객여운(佳客如雲)
"예수님, 제가 이렇게 삽니다"
1950년대는 누구나 다 가난했다. 6 - 25 후의 그 참담했던 생활
은 보리밥이라도 굶지만 않는다면 행운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사
실 그렇게 살았다. 봉급은 고사하고 밥만 먹여 준다 해도 얼마든
지 식모살이를 했으며 머슴도 밥 먹는 재미로 뼈 빠지게 일했지
가을에 받는 새경은 별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도 그 시절은 가난한 청소년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
가 어려도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뭘 사
달라고 속없이 조르거나 떼를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내 생일
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나에게 무슨 반찬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
으시곤 하셨다. 그러면 그때마다 두부찌개를 주문했는데 내가 두
부를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
리려는 뜻도 있었다.
어머닌 그때마다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 그리고 기껏 하신
다는 말씀은 "길웅이, 넌 양띠에 정월생이라 먹을 것이 변변치 못
한 것이다" 하시며 마치 내 팔자소관이 그 모양이니 못 먹어도 남
탓은 하지 말거라 하는 뜻으로 못을 박아 주셨다. 좌우간 난 생일
이 돌아오는 것이 싫었다. 싫은 것은 생일뿐이 아니었다.
수학여행철이 되면 부모님보다 내가 더 불안했다. 그래서 항상
내가 먼저 여행을 안 간다고 말을 꺼냈는데 집안 살림이 너무도
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돈을 달라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모님은 그때마다 여행을 가라고 권하셨으나 그러나 그것은 다
만 인사치레 말씀이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내 쪽에서 여행을 간다
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식구들의 생일이 돌아오면 없는 살림
에 생일치레 걱정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생일을 맞이하는 쪽에선
굉장히 불안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동생의 병으로 인해 여러 가
지 속상하고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어딘가에 돈을 써야 할 일
이 생기면 집안에 불화가 가끔 생겼다. 그래서 생일날은 이래저래
고역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이 되고 나서는 객지생활을 죽 했기
때문에 생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아무리 객지에 혼자
살아도 나는 내 생일을 결코 잊고 지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은 무슨 원수를 갚기나 하는 듯이 술을 억수같이 퍼마셔서 인사불
성이 된 채 지내곤 했는데, 그것은 생에 대한 일종의 비관이었다.
본래 나는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결국 엉뚱한 학교에 들어가
선생이 되었으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며 기쁨도 없었다. 다
만 신부가 못된 탓으로 섬마을 선생이 되어 열심히 봉사하긴 했으
나 그러나 가난과 우환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을 그런 식으로 달랬
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하
느님의 은총이었다.
신학생 때는 생일을 쇠지는 않는다. 다만 영명축일이라 하여 세
례명의 축일을 지내는데 그러나 요란스러울 것이 없기 때문에 부
담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 나자 다시 '생일 콤플렉
스' 에 빠져서는 그 잘난 영명축일 돌아오는 것이 아주 불안했다.
아마 어렸을 때 눈치 보며 숨던 기질이 그래로 살아 있었던 모양
이 었다.
대개 본당에서는 본당신부님의 영명축일을 가급적 성대하게 차
려 주려고 한다. 또 그런 식으로 해서 이웃 본당의 신부님들을 초
대하여 음식을 나누곤 하기 때문에 그것은 일종의 품앗이요 또 신
자들 편으로 봤을 때는 본당신부에 대한 당연한 예의요 인사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신자들의 마음도 편했다.
사랑이란 늘 주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받기 싫
어도 받아야 하는 것이 애덕이 될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받는 훈
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축일 같은 행사가 돌아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 6월이었다. 미국에서 그 달 셋째 주일은 '아버지날'
이었고 바로 그 주간 목요일이 내 영명축일이었는데, 내 축일을
아무도 모르는지 누구 하나 꽃을 달아 주는 이가 없었고 미사 중
에도 누구 하나 기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
지 원했던 일이요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는데도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참으로 별일이었다. 왠지 무시당한 기분이었고 괘씸한 생각까
지 들어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건
이 잘 진행이 됐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영판 추저
분해 졌다.
"예수님, 제가 이렇게 삽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