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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글 : 유영봉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23 조회수460 추천수5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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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 축일 / 루카 1, 57-66.80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죽음의 의미 묵상 길잡이 : 세례자 요한은 구약 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 탄생과 생애와 죽음이 예수의 전형(前型)이라 할 수 있다. 요한은 자신 의 백성을 만들지 않고 모든 이를 예수께로 인도했다. 참으로 모든 신앙인이 가야 할 모범이시다. 1.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예수 탄생의 전주곡이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리고 오래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그 절정에 이르렀 을 때 일출을 알리는 새벽빛처럼 오신 분이다. 오랜 침묵의 기다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며 참고 기다려 온 밤의 끝자락에서 동트는 해와 같이 오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열강들의 쉴 새 없는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살아왔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할 그 때에도 로마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며 메시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예언자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마 태3,4) 광야에 나타나 "회개하여라.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마태3,2)외치자 백성들의 시선은 일제히 요한에게로 쏠렸다.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그분이 오시는가 보다"하 며 긴긴 기다림의 한(恨)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요한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이었다. 2. 요한은 자신의 백성을 만들지 않았다. 가뭄에 단비처럼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눈 이 번쩍 뜨일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유다 각 지방과 요르단 강 부근의 사람들이 다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마태3,5-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셨다.(마태3,3,13이하) 그만큼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 가끔 등장했던 가짜 메시아들은 "나를 따르라"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 나보다 훌륭한 분이 내 뒤 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마르1,7-8)고 선언하였다. 남의 입에 들어간 것도 빼앗아 먹으려고 혈안이 된 듯한 세상에서, 자기를 메시아로 여기며 모여드는 백성들을 그대로 예수님께로 돌려보내기란 분명 쉽고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세례자 요 한은 사람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지 않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들 을 자기 백성으로 만드는 일', 사목 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두고 "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세례자 요한을 격찬하셨다. 3. 예언자는 죽음으로 말한다. 그러나 세례자 요 한의 죽음(마르6,14-29참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그렇게 극찬한 대 예언 자 세례자 요한은 시숙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사는 여자 헤로디아의 욕심과 원한의 희생물로 어이없이 죽고 만다. 딸의 춤사위를 보고 기분이 좋아 딸에게 내 뱉은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마르6,22-23)는 한마디 의 허풍 가득한 맹세. 이 기회를 놓칠세라 헤로디아는 어린 딸을 시켜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가져다 주십시오." (마르6,23)하고 청한다. 참으로 기쁨을 나누는 생일날에, 초청한 귀빈 들 앞에서, 그것도 어린 딸을 시켜 청할 수는 없는 끔찍하고 사악한 발상이 아닌가? 그러나 왕은 그 헌신짝 같은 맹세를 지켜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고 만다. 어찌 하느님 의 예언자가 이렇게 파리 목숨처럼 죽을 수 있단 말인가 ? '이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종으로 열심 하게 살았다면, 죽음을 맞을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가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람, 대 예언자가 이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가끔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가 ? " 하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묵상해 봐야 한다.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은 어떠했는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르15,34)하며 인간들뿐 아 니라, 하느님께로 부터도 버림받은 것 같은 극도의 고독 중에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결코 평화와 위로 가득한 가운데 숨을 거두시지 않았다. 링컨도, 마르틴 루터 킹도, 마하트마 간디도 모두 괴한이 쏜 총탄에 맞아 비명에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예언자는 언제 나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세상에 외친다. 그러나 예언자의 가장 힘 있는 외침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울려 퍼진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정의를 외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할 때 진 정한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고, 그 정의를 외치다 죽음을 당했기에 참 예언자가 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못지않게 '무엇을 위해 죽느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축일에 깨닫자. ♡ ◆ 유 영봉 야고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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