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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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시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24 조회수698 추천수1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He asked for a tablet and wrote,
“John is his name,”
and all were amazed.
Immediately his mouth was opened,
his tongue freed, and he spoke blessing God.
(Lk.1,63-64)



제1독서 이사야 49,1-6
제2독서 사도행전 13,22ㄴ-26
복음 루카 1,57-66.80

몇 년 전의 일이지만, 가끔씩 떠오르는 씁쓸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제게 새벽을 열며 묵상 글에 대한 질문을 던지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새벽에 일어나 묵상을 하고, 그 묵상을 토대로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그 형제님께서는 저의 묵상시간 쓰는 시간이 짧아서인지 묵상 글에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공적인 글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성의 없이 묵상 글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바에는 글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들었지요.

솔직히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지금 역시 제가 글을 잘 쓰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글 쓰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어렸을 때부터 글 잘 쓴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의 없다는 말에는 상처를 받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글을 쓰는 시간이 짧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묵상 글을 쓰기 위한 소재들, 즉 일상의 삶에서 생각하고 묵상했던 것들을 저는 수시로 컴퓨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책이나 인터넷에서 보았던 좋은 글들도 꼼꼼히 정리하면서 묵상 글을 조금이라도 더 풍요롭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남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조용한 새벽에 일어나 묵상을 하면서 정리를 한 뒤, 짧은 시간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묵상 글을 쓰는 시간이 짧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나를 온전히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저의 예를 들었지만 이러한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발견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 편한 데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여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가 주님의 천사로부터 세례자 요한 잉태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편한 데로 인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하여 받아들이지요. 즉, 나이든 자신과 아내의 처지만을 생각하고 있을 뿐, 하느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아닌 인간의 관점으로만 받아들이려던 그 아둔함이 그를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지요.

이 즈카르야의 모습이 우리에게 쉽게 발견됩니다. 하느님의 계획과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들. 항상 내가 기준이 되어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들. 즈카르야의 모습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요한. 그의 탄생일인 오늘을 보내면서 우리는 과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서만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를 주고 한 개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아홉 개를 주고 더 주지 못하는 한 개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사랑이다.(권소연)


어제 자전거를 타다가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은옥씨의 노래 '윙윙윙' 잘 들었습니다.



식물과 동물의 차이점
 

어떤 책에서 식물과 동물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식물은 움직이면 죽고, 동물은 가만있으면 죽는다.’

잘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이러한 큰 차이점이 있었구나 라는 사실에 공감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즉, 어떤 존재로 태어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가질 수만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와 너라는 서로 다른 존재가 똑같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왜 나와 같지 않아!’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까요?

바로 상대방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을 때, 나의 삶의 방식 역시 남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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