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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명(召命), 명명(命名), 사명(使命) - 6.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24 조회수368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6.24 주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ㄴ-26 루카1,57-66.80

 

 

 

 

 




소명(召命), 명명(命名), 사명(使命)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두 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두 분이 얼마나 중요한 분이며 긴밀한 관계에 있는 지 깨닫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 없는 예수님,

또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운명공동체처럼 하나의 운명이 된 두 분의 관계 같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 중 마음에 와 닿은 정다운 말마디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서판에 위의 말마디를 쓰자마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참 좋은 이름 요한이요,

되뇔수록 정다운 말마디 ‘그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 대신 내 세례명이나 수도 명을 넣어

‘그의 이름은 ( )’ 한 번 고요히 불러 보며

내 성소를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모델입니다.

요한의 삶의 거울에 내 삶을 비추어보면

내 삶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환히 들어날 것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을 한껏 경축하며

그분의 삶을

‘소명(召命), 명명(命名), 사명(使命)’에 걸쳐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소명(召命)의식입니다.

 



요한뿐 아니라 우리도 불림 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소명의식이 투철해야 충만한 존재로 살 수 있습니다.

불림 받았다는 자체가 은총이요 존재이유입니다.


이사야뿐 아니라 세례자 요한은 물론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다음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분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바로 이게 부르심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하느님의 계획안에는 이미 우리의 복된 운명이 예고되어있습니다.


우연히 여기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기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만일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참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하고 허무한, 불쌍한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요한의 운명이자 사랑이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예수님 역시 우리의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명으로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성 세례자 요한-예수님=허무’이듯이 ‘우리-예수님=허무’입니다.

‘성 세례자 요한+예수님=충만한 존재’이듯이

‘우리+예수님=충만한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입니다.

주님을 떠나선 ‘참 나’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참 나’의 실현입니다.

 

 

 

 

 




둘째, 명명(命名)의식입니다.

 



불러주신 소명도 은총이듯이 이름을 지어주신 명명도 은총입니다.


소중한 이름입니다.


도대체 이름이 없다면 존재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익명,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입니다.

무수한 꽃송이들 중 한 꽃송이 불과할 것입니다.

폈다 져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이름이 있어 부를 수 있고 불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언젠가 인천 부둣가 소풍 갔을 때

무수한 갈매기를 볼 때도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언제 태어나 언제 죽어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이름 없는 무명의 갈매기들,

잠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도저히 사람은 이럴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마음에 각인되었습니다.

 


요한의 작명과정도 인상적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이름임이 분명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할 때,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라는

엘리사벳의 단호한 반대가 이를 입증합니다.

 


아마 즈카르야는 벙어리가 되어 긴 침묵 피정 중

이름에 대해 많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의 이름은 요한’이란 글자를 쓰는 순간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거룩한 침묵 속에서 태어난 참 좋은 이름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자애로이(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이라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요한뿐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우리 이름 참 좋습니다.


한글이름이든, 세례명이든, 수도명이든 모두 좋습니다.

겸손할 때 빛나는 이름의 가치입니다.


세 경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강우일 인사드립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장례식 때

강우일 주교님의 호칭을 생략한 한글 이름 그대로가 참 신선했습니다.

 


얼마 전 여기 수도원에서 피정을 마치고 떠나신

염 수정 대주교님의 이메일 편지 마지막 부분,


호칭을 생략한

‘염 수정 드림’이란 소박하고 겸손한 분위기도 잊지 못합니다.

 



또 우리 본원 수사님께 전화 걸었을 때 수사라는 호칭을 생략한

‘예, 나자로입니다.’라는 참 소박하고 경쾌한 대답도 잊지 못합니다.



부르라 있는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에서 요한 대신 내 이름을 넣어

‘그의 이름은 ( )’ 자주 불러 보며 내 소명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사명(使命)의식입니다.

 


사명의식이 뚜렷해야 주어진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냥 막연히 되는 대로가 아닌 목표의식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사명 수행에 전제되는 게 신뢰와 겸손, 인내의 수련입니다.



요한이 사명을 다 마칠 무렵,

겸손의 고백은 바로 항구한 겸손의 수련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 없는 요한은 무의미합니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닦는 겸손의 사명 수행에 항구할 수 있었음은

침묵과

고독의 광야에서의 항구한 인내와 신뢰,

겸손의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다음 복음의 말미에 대한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손길, 굳센 정신, 광야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요한이 사명활동에 나서기까지

주님 친히 요한의 수련장이 되시어

광야 수련원에서 인내와 신뢰, 겸손의 수련을 시키셨음이 분명합니다.


하여 하느님은 때가 되어 요한이 사명의식이 무르익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시어 주님의 길을 닦는 사명에 전념케 하셨습니다.



요한의 광야만이 아니라 우리도 인생광야를 살아갑니다.

주님 친히 우리 인생 광야 수련원의 수련장이 되시어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주님의 지도에 따라 신뢰와 겸손, 인내의 수행에 항구할 때

우리의 사명 수행도 순조로울 것입니다.

 

 

 

 

 




모두들 힘겹게 살아갑니다.

생존에 급급하다 보면 하느님도 나도 잊기 쉽습니다.

 


예나 이제나 성인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감사하며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성인들 되라고 불림 받았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내 삶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 나’를 사는 이들이 성인들이요

이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소명의식에 투철하여 충만한 존재로 살아야합니다.

 

 


이름 지어 받았다는 명명(命名)의식에 투철하여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사명의식에 투철하여 인내와 신뢰, 겸손을 살아야 합니다.

 

 



성 요한 세례자의 삶이 그러했으며 우리 모두 성인의 되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이사야를 통해

새 이스라엘인인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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