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명(召命), 명명(命名), 사명(使命) - 6.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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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6-24 | 조회수374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12.6.24 주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ㄴ-26 루카1,57-66.80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두 분 뿐입니다.
두 분이 얼마나 중요한 분이며 긴밀한 관계에 있는 지 깨닫게 됩니다.
또 예수님 없는 세례자 요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운명공동체처럼 하나의 운명이 된 두 분의 관계 같습니다.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그의 이름은 ( )’ 한 번 고요히 불러 보며 내 성소를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의 삶의 거울에 내 삶을 비추어보면 내 삶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환히 들어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불림 받았다는 자체가 은총이요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다음 말씀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분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하느님의 계획안에는 이미 우리의 복된 운명이 예고되어있습니다.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기에 존재하게 되었고 또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참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하고 허무한, 불쌍한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예수님 역시 우리의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 세례자 요한+예수님=충만한 존재’이듯이 ‘우리+예수님=충만한 존재’입니다.
주님을 떠나선 ‘참 나’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참 나’의 실현입니다.
그냥 익명,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입니다. 무수한 꽃송이들 중 한 꽃송이 불과할 것입니다. 폈다 져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무수한 갈매기를 볼 때도 이름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이름임이 분명합니다.
‘안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라는 엘리사벳의 단호한 반대가 이를 입증합니다.
이름에 대해 많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자애로이(불쌍히) 여기신다.’라는 뜻이라 하니
겸손할 때 빛나는 이름의 가치입니다.
강우일 주교님의 호칭을 생략한 한글 이름 그대로가 참 신선했습니다.
염 수정 대주교님의 이메일 편지 마지막 부분,
‘예, 나자로입니다.’라는 참 소박하고 경쾌한 대답도 잊지 못합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에서 요한 대신 내 이름을 넣어 ‘그의 이름은 ( )’ 자주 불러 보며 내 소명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의 고백은 바로 항구한 겸손의 수련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침묵과 고독의 광야에서의 항구한 인내와 신뢰, 겸손의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요한이 사명활동에 나서기까지 주님 친히 요한의 수련장이 되시어 광야 수련원에서 인내와 신뢰, 겸손의 수련을 시키셨음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시어 주님의 길을 닦는 사명에 전념케 하셨습니다. 주님 친히 우리 인생 광야 수련원의 수련장이 되시어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우리의 사명 수행도 순조로울 것입니다.
생존에 급급하다 보면 하느님도 나도 잊기 쉽습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내 삶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 나’를 사는 이들이 성인들이요 이들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새 이스라엘인인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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