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찬미의 영성 - 7.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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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7-04 | 조회수425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2012.7.4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아모5,14-15.21-24 마태8,28-34
‘샬롬(평화)’는 유대교인들의 인사말이고 ‘알렐루야(주님을 찬미하라.)’는 그리스도교인의 인사말이요 우리는 이를 ‘찬미 예수님’으로 바꿔 사용하곤 합니다.
찬미의 아름다움입니다. 장차 세상의 구원은 찬미의 영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미의 구원입니다. 찬미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혼자든 함께하든 찬미의 삶이 몸에 배여 있어야 합니다.
사막 같은 세상에 메말라 가는 영혼을 살라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주일이나 축일 때 마다 늘 부르는 다니엘의 찬미가는 온 세상이 찬미 공동체임을 입증합니다.
사람이나 생물은 물론 자연을 함부로 다루거나 착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압도하는 인공물에 자연을 참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대형 건축 장비들이 이젠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 손 가면 사람이든 자연이든 망가지기 때문이요 도대체 전 국토가 성한 곳이 없습니다. 쉴 만한 자연이 없어 날로 거칠어져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8세 때 지었다는 시를 소개한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다. 멀고 가까움이 다른 까닭이다.” 작은 산을 보고 논쟁하는 감이 없지 않다. 큰 산 쪽으로 환원하면 (논쟁이) 큰 산을 그리는 아주 좋은 이론적 연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큰 산을 보는 쪽으로 전환했으면 좋겠다.-
다산 정약용이 8세 때 지었다는 시가 놀랍습니다.
작은 산에 막혀 그 멀리 큰 산을 못 보는 근시안의 사람들입니다. 마치 창밖의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방안에 풍경화를 걸어놓는 것과도 같습니다.
탐욕의 환상이 만들어낸 작은 산들에 가려 살아가는 대부분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큰 산인 하느님을 뵘으로 텅 빈 충만의 부자요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고 내적공허를 무엇인가로 부단히 채움으로 부단히 작은 산들을 만들어 채움으로 큰 산인 하느님을 뵙지 못하니 여전히 마음을 허할 뿐입니다.
활동주의 병에 찬미의 영성보다 더 좋은 치유제는 없습니다.
‘활동의 기쁨(the joy of doing)’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의 기쁨(the joy of being)’을 누리게 하는 찬미의 관상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큰 산에 닿게 합니다. 하느님 큰 산과 일치되어 살게 합니다.
하느님의 참됨을, 선하심을, 아름다우심을 찬미하는 영성입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
큰 산 같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하느님의 큰 산을 가려버리는 온갖 허례허식의 작은 산들 같은 전례행위를 거둬버립니다.
이게 진짜 찬미의 영성입니다. 찬미의 영성이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찬미의 사람이 진정 참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살 길은 찬미의 영성뿐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의 사람으로 살아야 불가마 같은 세상에서 온전한 영육의 사람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비로소 괴물에서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구원된 마귀 들렸던 사람입니다.
큰 산이신 당신을 가리는 작은 산들의 환상을 말끔히 거둬주시고 큰 산이신 당신과 일치되어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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