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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 원장의 차이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06 조회수572 추천수6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3 어떤 꿈과 현실

두 원장의 차이
사람은 어쩌니 해도 덕을 좀 닦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세 상을 사람답게 사는 지혜이다. 특히 윗자리에 있을 때 겸손한 자세 로 봉사해야 하며 가진 것이 있을 때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정말 우리가 봉사한 만큼 그 세상을 차지하게 되며 사랑을 나눈 만 큼 또 세상으로부터 되돌려받게 된다. 소록도의 80년 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 나환우들에 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했던 원장이나 직원들은 역시 비인간적인 대 접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참 사랑의 봉사를 했던 원장 은 역시 참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그가 죽은 뒤에도 소록도에 여 전히 남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초대 원장이었던 아리까와(蟻川? : 1916~1921)는 나환우들의 생 활양식을 순전히 일본식으로만 강요했는데, 이를테면 훈도시(일본 식 팬티)위에 하오리와 하까마를 입고 게다(일본식 나무 슬리퍼)를 끌고 다녀야 했으며, 먹는 음식에서부터 다다미 잠자리에 이르기까 지 환우들은 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교도소와 같은 운영 방식으로 나환우들을 마치 노예 나 짐승처럼 다루었으며 일체 다른 생각을 못하게 오직 작업에만 지 치도록 시달리게 했다. 도주를 받지하기 위하여 하루에도 두 차례씩 점호를 취했으며 환우들 간의 왕래를 제한하였고 또한 일본 황실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토록 강요했다. 그런데 하나이(花井善吉 : 1921~1929)라는 군의관 출신의 2대 원 장은 좀 달랐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달랐다. 그는 군인답지 않게 아주 자상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원생들의 삶의 질을 높여 주었으며 환 우들이 원했을 때 과감하게 일본식의 생활양식을 뜯어고쳐 한국식 의 생활 풍습과 전총을 존중해 줬다. 배급량도 대폭 늘려 자유 취사를 허용했으며 의식주에 있어서 불 편이 없도록 안배를 했고 또한 신앙의 자유도 보장하여 신사 참배의 의무를 폐지하였다. 또한 일본의 천조대신을 모시던 사당을 철거해 버리고 기독교 예배 전용으로 하는 등 그는 실로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환자들의 교육을 위해 힘썼으 며 오락 시설을 확장하고 환자 위안회를 조직하여 병에서 오는 외로 움과 또한 고향을 등져야 했던 아픈 상처를 달래 주려는 노력을 많 이 했다. 그는 일본 사람이면서도 한국의 나환우들을 친가족처럼 돌 보았다. 환우들은 하나이 원장의 민족을 초월한 헌신적인 사랑에 감동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원장의 덕을 기리기 위해 환우들이 자발 적으로 모금을 하여 창덕비(彰德碑)를 세우고자 했으나 하나이 원 장의 강력한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원장이 과로로 순직을 한 그 이듬해에 이르러서야 본관 옆에 겨우 세울 수가 있었다. 이 창덕비는 해방 후 정부의 일제 잔재의 청산 정책에 밀려 한때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몰래 땅에 묻 었다가 시기를 기다린 뒤에 마침 5 -16 군사 쿠데타 이후 대일 감정 이 완화된 시기에 발굴하여 본래의 자리인 구 자혜의원 옆에 다시 세워 하나이 원장의 옛 덕을 기리고 있다. 하나이는 이처럼 자신이 닦은 덕으로 인해서 민족을 초월한 존경 과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실로 멋진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제 민족을 못 잡아먹어 안달을 부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힘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환우들을 짐승처럼 혹사시 킨 원장도 있었다. 4대 원장에 부임한 수호(周防正季 : 1933~1942)는 의사이면서 건 축에 있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단히 야심적 이고 명예욕이 강했기 때문에 소록도 자혜의원장으로 오면서 소록 도에 세계적인 나요양소를 건립하기로 작정하고 나환우들을 이용하 여 자신의 야망을 펼쳐 나갔다. 먼저 환자 대표를 10여 명 선발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고 그들 에게 지상 낙원의 건립을 역설하여 감동을 시킨 뒤에 환자들의 자발 적인 노동력 제공을 얻어냈다. 그리고 벽돌 제조 공장을 만들어 병 사와 사무본관, 그리고 치료본관 등을 준공하였는데 이때 환우들이 치러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차 확장공사를 성공리에 마친 수호는 다시 2차 확장공사에 착수 했는데 이때부터는 환자들이 좀처럼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자 수호 는 자신의 심복인 사또(佐藤三代治)라는 간호주임을 이용하여 강제 노역을 시켰는데 환우들을 얼마나 혹사를 시켰는지 도주하는 자들 이 늘어났으며 부상자들도 속출하였다. 이에 병원 당국은 도주하는 자를 감시하기 위하여 엄동설한에 바 위투성이의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순찰도로를 개설했는데 이는 실로 뼈를 깎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때 동상에 걸려 손가락 발가 락이 떨어져 나간 자들이 수없이 많이 생겼으며 강제 노역에 대한 환자들의 불만도 거세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또는 배급하는 양곡에서 일정량을 떼어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국방헌금을 내도록 강요하니, 먹는 것의 부족과 약품 공급의 부족으로 환자들의 병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런데도 사또 는 더욱 포악한 방법으로 작업을 독려하니 환자들의 요양생활은 마 치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사또가 하루는 이동(李東)이라는 젊은이에게 작업을 시켰는데 이 동은 자기 부락에서 갑자기 생긴 응급환자 때문에 일을 제때에 하 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사또는 그를 감금실 (병원 내에 있는 자체 감옥)에 가둬 놓고 여러 날 동안 심한 매질을 한 뒤에 끝내는 그를 단종(斷種)수술을 시켜 출감시켰는데 그때 젊은이가 쓴 애절한 시 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 이하 생략 ----- 수호 원장은 야심에 찬 자신의 계획으로 총독부나 일본 왕궁의 총 애를 받기도 했는데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환자들의 병세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고 상처가 심한 상태에서 노예처럼 끌려 다니며 혹사를 당 했다. 이때 매를 맞고 죽는 사람, 탈출하다 바다에 빠져 죽는 사람들 이 나오게 되었다. 3차 확장공사까지 끝낸 수호 원장은 드디어 자신의 동상 걸립에 착수하는데 이때도 사또가 주동이 되어 환자들로부터 기금을 강요 했다. 환자들은 자진 헌납의 명목으로 각 사람이 3개월분의 임금을 바쳐야 했으며 노동을 하지 못하는 중증 환자들은 배급 식량과 의복 을 팔아서 건립기금을 납부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제작된 동상은 각계의 여러 인사들을 초청하여 제막 식을 성대하게 가졌다. 그리고 매월 20일은 보은감사일(보은 감사 일)로 정하여 전 원생들을 자신의 동상 앞에 집합시켜 참배케 하였 으며 공원 간수는 매일의 참배객 수를 부락별로 사또에게 보고함으 로써 평일에도 참배를 강요당하곤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에 수호 원장이 자신의 동상 앞에서 환자 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보은감사일에 훈시차 동상 앞으로 가던 수호는 이춘상이라는 건장한 환자가 휘두른 칼에 가슴 을 찔렸는데 이때 이춘상이가 외친 말은 "너는 환자에 대하여 무리 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였다. 그 후로 수호 원장의 동상은 소록도 공원에서 자취도 없이 슬그 머니 사라졌고 오직 하나이 원장의 창덕비만이 민족의 벽을 넘어 옛 자리에 그대로 남아 후세에 그 공을 전하고 있다. 아무리 약자라 해도 그 약자를 힘으로 누르려 했던 자는 결국 약 자의 힘에 의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슬프게 사라진다. 그러나 아무 리 약자라 해도 그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는 바로 그 약자등에 의해서 후세에까지 그 빛을 널리 전하게 된다. 세상은, 악하게 살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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