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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복한 삶 - 7.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15 조회수376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2.7.15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아모7,12-15 에페1,3-14 마르6,7-13

 

 

 

 

 



행복한 삶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행복하게 살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권리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다는 것은

바로 행복을, 자유를, 사랑을 찾는 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행복한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지 살 줄 알면 행복이다.’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

어느 유명인사들 간의 인터뷰 중 다음 문답이 신선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입니까?”

 


“전 언제나 ‘지금’이예요.

  30대 후반 부터는

  늘 행복한 일이 오늘, 오늘, 오늘로 갱신되어 온 것 같아요.”

 


참 행복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관성은 참 무섭습니다.

오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내일도 행복하게 살고,

오늘 감사하는 사람이 내일도 감사하며 삽니다.

오늘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내일도 불행하게 살고,

오늘 불평하며 사는 사람은 내일도 불평하며 삽니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도, 만드는 것도 아니라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의 눈만 열리면 누구나 행복한 존재임을 발견합니다.


어제 신문에서 어느 초등학생이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던졌다는 말도 저에겐 화두였습니다.

 


“아저씨, 뭐 하는 사람이에요?”

 


문 후보는 초등학생의 질문에 진땀을 흘리며


‘정치하는 사람’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

이라고 설명했다 합니다만 문 후보 자신도 자신의 신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화두 같은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렇게 물어온다면

즉각적으로 확신에 넘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모스는 행복한 예언자였습니다.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에 대한 아모스의 대답이 통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이처럼 성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정체성 또렷한 행복한 삶입니다.


또 어제 읽은 내용도 소개합니다.

19세기 말 이집트 나일강 서쪽 옥시린쿠스의 쓰레기더미에서

기원 후 300년경 한 인물이 신에게 묻는 질문들을 적어

신전에 바친 질문서가 나왔다는데,

그 중 마지막 12번 째 질문이 의미심장했습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삶의 밑바닥에서 인간이 만나게 되는 질문입니다.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서의 간절한 소망이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요 나 자신으로 살 때에야 비로소 참 행복입니다.

 

 

 

 

 




첫째, 축복 받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행복의 첫째 조건이자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 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았다는 자각이 나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합니다.


오늘 에페소서 찬가가 은혜롭기 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축복을 상기시킵니다.


정말 몰라서 불행이요 알면 행복이요 축복이란 말을 실감합니다.

에페소서 찬가,

초대 에페소서 교회 신도들이 함께 불렀던 찬가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매 월요일 저녁기도 세 번째 부분에서 이 찬가를 부릅니다.

원래 에페서 1,3-14절 까지 찬가는 그리스어로 한 문장이라 합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감격에 벅차 내리 노래했던 것입니다.

 

주어는 모두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또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참 풍요로운 축복의 선물입니다.

이를 깨달아 알 때 누구나 행복하고 부요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이 모든 축복의 요약이 바로 미사은총입니다.

미사 안에 이 모든 축복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넘치는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몰라 부자면서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거지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주시는’ 분이요 우리는 ‘받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이 자리에 없지 않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요,

축복덩어리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과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이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승들은 밥 먹듯이, 숨 쉬듯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인 찬양과 감사의 성무일도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가 나 자신으로 살기위해 찬양과 감사의 기도는 필수입니다.

오늘 에페소서 역시 찬미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 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찬양과 감사의 삶이 우리의 신원을 뚜렷이 합니다.

의미 충만한 존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니게 합니다.


찬양과 감사에 우리의 구원이 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삶, 바로 이게 우리 삶의 의미이자 목표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삶이 허무주의의 유령을, 무의미의 어둠을 물리칩니다.

찬양과 감사의 삶이 없어 온갖 정신 질환에 방황이요 혼란이요

무절제, 무기력, 무감동의 삶입니다.

도대체 찬양과 감사의 기쁨이 없다면

무슨 기쁨, 무슨 맛으로 이 광야인생 살아갑니까?


혼자 바치는 찬양과 감사보다는

함께 바치는 공동찬양, 감사 기도가 제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보다 더 좋은 하느님 찬양, 감사기도는 없습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기도보다 영적수행에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찬양과 감사기도가 마음의 눈을 열어줘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하고

더욱 찬양과 감사의 삶에 전념케 합니다.


하느님 주신 축복에 찬양으로 응답할 때

주님은 또 우리에게 맞갖은 축복을 내려 주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셋째,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느님 축복에 대한 응답은 복음 선포입니다.

혼자 누리라는 축복이 아니라

찬양과 더불어 이웃과 나누라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이래서 주님은 축복을 주신 후에는

당신 사람들을 모조리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주님은 유다 출신 아모스를 북 이스라엘에 파견하셨고,

복음의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둘 씩 짝지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파견과 더불어 제자들에 대한 당부가 의미심장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최대한 간편한 차림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축복으로 내적 부자이기에

이런 무소유의, 무공해의 삶이 가능합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텅 빈 충만의 내적풍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처신을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마귀는 쫓겨나고 병자들은 치유되니

제자들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얼마 전 예언자적 통찰 가득 담긴

‘성장시대의 종언’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제 성장 없는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자원에 끊임없는 외적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며

이젠 외적성장이 아니라

내적성장과 성숙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끊임없는 외적 경제 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한 없이 망가진 인간이요 자연이 아닙니까.


공존공영이 아닌 공존공빈,

환대와 우애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제자들의 무소유의 삶이 오래된 미래처럼

우리에겐 비전이자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하느님의 축복을 깨닫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깨달아 알아 갈수록

관심은 외적성장이 아닌 내적성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에로,

외적성장에서 내적성장으로 문명의 전환기에 처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말로만의 복음 선포보다는

복음의 제자들처럼 내적 풍요를 상징하는

가난하고 단순한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행복한 삶에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내일도 행복을 삽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못 살면 내일도 못 삽니다.

행복은, 축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요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어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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