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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망의 등대 - 관상가 - 7.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21 조회수607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2.7.21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미카2,1-5 마태12,14-21

 

 

 

 

 




희망의 등대

 

-관상가-

 

 

 

 

 



관상의 깊이, 관상의 힘, 관상의 기쁨입니다.

활동의 깊이, 활동의 기쁨이 아닙니다.

 


존재의 깊이, 존재의 힘, 존재의 기쁨입니다.

소유의 깊이, 소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오늘은 ‘관상’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모두의 희망이 되는 희망의 등대가 바로 관상가입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결핍된 것이 관상입니다.

관상의 결여로 점증하는 두려움과 불안에 온갖 심심의 질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모두

하느님의 관상으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열정이 없어, 열정이!”

 

어느 수녀회를 창립한 거룩한 노신부님이

수녀님들에 대해 했다는 탄식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아마 이에 하나 덧붙인다면 다음 말씀이 될 것입니다.

 


“깊이가 없어, 깊이가!”

 


작금의 천박한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관상의 깊이, 존재의 깊이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이런 만남에서 샘솟는 기쁨과 평화요 심신의 치유입니다.


어느 자매님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수도원을 왔어도 이런저런 걱정에 싸여 지내다보니

  불암산이 이렇게 좋은 것을 늦게야 발견했습니다.”

 


관상의 눈이 열릴 때 늘 지금 여기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진리는, 길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으나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요

가장 깊은 곳에 계신 분 같으나 가장 얕게 계신

참 역설적인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사야의 주님의 종에서 바로 참 관상가인 스승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물론 참 관상가의 면모를 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주님 마음에 들어 주님이 선택한 관상가의 면모입니다.

 

 

 




첫째, 고요와 겸손의 관상가입니다.

 


깊은 물은 고요하고 빈 수레는 요란합니다.

고요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요

이런 고요의 깊이 자체가 꾸밈없는 겸손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와 일치합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소리 없이 고요 중에

존재 자체로서 할 일을 다 하시는 주님이요 주님의 관상가들입니다.

 

 

 




둘째, 항구함과 자비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 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바로 이 구절로 관상의 진위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항구함과 연민과 자비는 관상의 핵심입니다.


뜬 구름 잡는 관상이 아니라

현실에 깊이 뿌리 내린 항구함, 연민, 자비의 수행자가 진정 관상가입니다.


이런 요소가 빠지면 관상은 착각의 환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비가 부처요 사랑이 하느님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결국 자비와 사랑이 관상의 핵심임을 말해 줍니다.

 

 

 




셋째, 희망의 등대가 관상가입니다.

 


희망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희망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은 우리의 희망의 등대이며

그분을 따르는 그분의 관상가들도 희망의 등대입니다.


깊은 내면에서 주님과의 만남으로 솟아나는 관상의 빛이

희망의 참 빛입니다.

 

 

 


이런 관상의 맛, 하느님의 맛을 모르고

세상 맛, 돈 맛, 활동 맛, 일 맛, 소유 맛에 빠져 살다 보니

참 나의 실종이요 세상의 종, 탐욕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가 재앙을 선언하는 불의의 부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하느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아니라 불의한 부자들이 자초한 심판입니다.


세상맛에, 돈맛에 빠져 중독되어 자기를 잊고 살아갈 때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호남의 영산인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만월당에

송월주 조실 스님이 써놓은 글귀가 생각납니다.

 


“귀일심원요익중생(歸一深源饒益衆生;

 

  청정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 중생에게 필요한 이익을 준다)”

 


바로 하느님의 관상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관상의 깊이에서 주님을 만날 때

그 존재 자체가 이웃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관상의 깊이, 존재의 깊이에서

겸손과 자비의 주님을 만남으로

세상맛의 중독에서 치유되어 새로 거듭 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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