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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소에서의 혼인성사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25 조회수628 추천수1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모성애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본능 그 자체다.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되는 길 어머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기에 여섯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오는 동안 더욱 더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된 것이라고 믿는다. 공소에서의 혼인성사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연애결혼이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시기였다. 모든 결혼은 집안 간을 오가는 매파(중매쟁이)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양가 부모의 허락이 떨어지면 신랑과 신부는 서로 얼굴도 못 보고 백년가약을 맺어야 했다. 결혼의 주도권을 부모님이 쥐고 있는데다가 일단 혼인을 치르면 새색시와 친정부모는 오랫동안 거의 만날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요즘 같은 친정 출입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과년 한 딸을 둔 집에서 집안의 대를 이어 갈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대체 로 가난한 집의 아들을 데릴사위로 삼았다. 하지만 데릴사위는 웬만 한 부자나 양반이 아니면 데려올 수가 없었다. 누산리 김 진사댁 외할아버지는 매파를 통해 사윗감에게 얼마간 의 논마지기를 떼어 줄 의향이 있으니 데릴사위로 오겠느냐는 의중 을 흥신리에 전했다. 매파는 어머니의 고모님이 맡았다. 왕고모님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사가 성사될 때까지 흥신리와 누산리 양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하지만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 옛말이 있 듯이, 친가 쪽 입장에서는 멀쩡한 아들을 데릴사위로 보내는 것이 썩 좋을 리가 없었다. "말씀은 들어서 잘 알고 있읍니다만, 제가 김 진사댁 따님이 며느 릿감으로 부족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데릴사위라는 것이 마음 에 걸리네요." 당시 할아버지가 중매를 맡은 외가의 왕고모님에게 여러 번 하신 말씀이었다. "제 오라버니댁이 둘째 딸마저 시집을 보내고 나면 두 분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 큰 집안살림을 꾸려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데다 가, 댁에는 아들딸 형제들이 여덟이나 되지 않습니까. 셋째 아들을 처가살이 보낸다고 아들을 빼앗기는 것도 아니고, 모두들 제 조카딸 을 며느릿감으로 탐내고 있는 터에, 이렇게 좋은 혼처를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왕고모님의 끈질긴 설득에 할아버지는 차츰 마음이 흔들리기시 작했다. 더구나 그 당시는 일제 치하에 농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 로 전락해 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겨우 남의 땅을 부치더라도 소작료에 마름의 횡포까지 겹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 다. 슬하에 여덟 남매를 둔 할아버지댁의 상황은 더하면 더했지 나 을 것이 없었다. 가난 때문에 다른 집에 양자로 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아들딸을 종살이를 보내는 경우도 허다한 시절이었다. 물론 쌀 두 가미니를 번쩍 드는 힘 좋고 부지런한 셋째 아들이 집안에 큰 힘이 되기는 했지만, 남의 집 품 팔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대물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넌지시 운을 떼었다. "종철아, 누산리 김 진사댁에서 오신 분이 엊그제 또 다녀가셨다. 청혼도 간곡하고 며느릿감도 손색이 없으니 네 장래를 생각하면 무 리한 일은 아니다만, 일단은 네가 그 집에 가서 직접 색싯감을 잘 살 펴보고 와서 마음을 정하는 게 어떠냐?"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펄쩍 뛰었다고 한다. 그러 나 효성이 지극한 아버지는 계속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제가 한번 누산리에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일등 며느릿감으로 소문난 어머니를 직접 만나보기 위 해 어렵사리 누산리를 찾아갔다. 색싯감을 보고 결정하라는 할아버 지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아버지가 누산리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가 외간 남자의 출입에 화들 짝 놀랐다. 웬 건장하고 잘생긴 청년이 왕고모와 함께 마당에 들어 서자 크게 놀랐던 것이다. "흥신리 귀한 손님이 오셨다." 그 순간 어머니는 왕고모님의 말씀을 듣고 더 놀랐다. 그때 아버 지는 어머니는 작고 귀여운 체구와 정갈한 외모를 보고 단숨에 마음 을 정했다고 한다. 그게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버지는 마 음을 정한 후에는 일부러 일감을 만들어 누산리를 오가면서 어머니 를 만날 기회를 엿보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음에 어렵게 시작된 연분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마침내 할아버지와 외 할아버지 사이에 혼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어떻게 나와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내 아들을 데릴사위로 보낼 수 있단 말예요?" 할머니는 그 소식을 뒤늦게 듣고 할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항의를 했다. 더구나 아버지가 누산리 색시를 마음속에 정하고 자주 만나러 다니자 할머니의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들 혼사문제로 전쟁 아닌 전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도 누산리 며느릿감이 좋고, 우리 셋째도 직접 가서 보 고 좋다고 하는데, 왜 당신만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리는 거요." "아들놈을 팔아먹고 내가 억지라니!"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한 항의 표시로 아들이 누산리로 장가가 는 전날까지 각방을 쓰며 할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남편이 아들을 팔아먹었다고 분해서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목 놓 아 울기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아들을 데릴사위로 보내는 할아버지의 심정 또한 할머니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어려운 집안형편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버지와 어 머니의 운명적인 혼인은 성사되었다. 그리하여 1932년 가을, 누산 리 공소에서 본당 신부님을 모시고 혼인성사가 이루어졌다. 당시 누 산리에는 다른 곳처럼 성당이 없고 공소였기 때문에 행주 본당 주임 신부님이 오셔서 혼인성사를 집전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인성사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내가 성대하 다고 말한 것은 결혼식이 성대했다는 것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의 축 복 속에서 기쁘게 치러졌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두 분은 마침내 나 의 부모님이 되신 것이다. 1992년, 부모님 결혼 60주년인 회온식(회혼식)을 맞아 당시 부모 님의 혼인성사 문서를 찾으려고 수소문해 보았다. 그러나 누산리 공 소는 그대로 있지만 혼인성사 문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본당이 행 주, 영등포, 도림동, 김포 순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문서 보관이 제대 로 되지 않아 유실되어 버린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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