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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26 조회수866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7월 26일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



Gross is the heart of this people,
they will hardly hear with their ears, they have closed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be converted and I heal them.
(Mt.13,15)



제1독서 예레 2,1-3.7-8.12-13
복음 마태오 13,10-17

지난 여행 중에 페루의 한인천주교회에서 짧게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신앙인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살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당신의 그 큰 능력으로 이렇게 머리도 나쁘고 부족한 저를 크게 써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또한 주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신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순간 사람들이 많이 공감하시는 분위기여서 저 역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미사 후 자녀들이 자기 엄마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신부님께서 머리가 아주 나쁜데도 신부님이 되었다면서? 나도 이제 공부하지 않아도 되겠다.”

사실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부족한 사람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지만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함 역시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부족함에 머무는 것이 아닌, 주님의 영광에 의해 크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말했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었던 것입니다.

쉽게 이해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서만 받아들이니 그 비유가 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설명할 때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바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으니 우리와 함께 하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요즘 사회가 어수선해서인지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도 성서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그들의 해석 방법이지요. 결국 그들이 이해하는 예수님은 어떨까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아닌, 자기 안에 만들어 놓은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뿐인 것입니다.

사실 이천년 전에도 바리사이와 그 밖의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무조건 거부하고 자신의 잣대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다보니 엉뚱한 트집을 잡으면서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느끼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 안에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름이란 우리가 처음처럼 살아가는 여름일 테죠. ‘두 번 다시’란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여름(김연수).



티티카카 호수. 해발 3812미터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다는 것. 정말로 놀랍습니다.



부자되세요.
 

몇 년 전, 사람들 사이에서의 새해 인사가 “부자되세요.”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곧바로 표정이 밝아졌지요. 그러나 정말로 부자 되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요? 물론 부자가 되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된 후에 어떻게 나누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부와 나누지 않는 부는 내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족쇄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난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요. 또한 죽을 때 역시 아무 것도 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앤드류 카네기는 말했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잘 쓰고 떠나야 한다.”

주님의 삶은 철저한 나눔의 삶이었는데,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주님과 달리 철저히 소유의 삶을 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새벽 반성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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