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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 없이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27 조회수384 추천수1 반대(0) 신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며 힘겹고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
변화를 싫어하여 오래된 지도(地圖)나 관행(慣行)에 집착하고 쉬운 길을 가고 싶어하는 본능과 같은 습관을 극복하고 이겨내어야 영적 성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육체적 진화를 가로막는 듯한 이러한 저항을 극복해낸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다. 우리는 성장하고 본능과 습관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발전시키고 교양을 증진시키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된 더러운 수렁과 같은 본능에 안주(安住)하지 않고 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힘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과 마찬가지로 개인도 살아남으려면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성장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으며 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과 싸워야 한다. 개인이 발전하면 사회도 발전되게 마련이다. 어린 시절 우리를 키워주었던 문화는 어른이 된 우리에 의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마련이다.
이미 성숙한 사람들은 그 성숙의 열매를 혼자만 맛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개인이 진화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열매를 먹이게 됨으로써 인간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의 영적 성장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도처에 전쟁과 부패와 오염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성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인간이 계속하여 성숙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앞선 세대가 자신의 기대보다 덜 성숙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역겹고 한심하게 보이는 행동들이 옛날에는 당연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요 주제인 자녀의 영적 성장에 대해, 그리고 부모가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자. 오늘날에는 이 주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놀랍게도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비록 오늘날에도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몇 세대 전에 비해서는 훨씬 나아졌다. 그 예로 자녀 양육의 모습을 다룬 최근의 연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로마법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이를 팔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절대권력이라는 이 개념은 영국 법에도 계승되었으며, 14세기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중세에도 아이들은 지금처럼 한 개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를 작업장에 보내어 심부름을 하거나 일을 배우게 하는 일이 많았다. 배우는 것은 부차적이었고 고된 노동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여기고 특별히 다루고 사랑으로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15세기가 되어서였다.(AndréP. Derdeyn, “Child Custody Contests in Historical Perspective.”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Vol. 133, No. 12(Dec. 1976), p.1369)》
 
그런데 개인과 인류 전체의 등을 떠밀어 무기력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극복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이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나는 ‘사랑’‘자기 자신과 타인(他人)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아(自我)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성장한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성숙하게 만든다. 또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타인도 덩달아 성숙하게 된다. 자아의 발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랑’은 이렇게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는 진화의 힘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여지없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시하는 기적적인 힘이다.
(M. Scott Peck, 『The Road Less Traveled』, p.266-268)
 
스캇 펙 박사는 ‘사랑’‘자기 자신과 타인(他人)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아(自我)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의지’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신의 말이나 자신의 판단만 옳다고 생각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수가 많다.
그리하여 사랑을 모르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사랑을 올바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왜곡된 사랑을 대물림 해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모계사회이므로 이 때문에 딸은 친정 어머니의 판박이가 되어 가정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는데, 딸이 깨어 있지 않으면 의롭지 않은 친정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도 의롭지 않게 되어 의로운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어머니의 무명(無明)에 기인(起因)하여 오늘도 슬픈 역사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충만해야 성숙한 인간이 된다. 사랑은 말로써는 전달되지 않고 오로지 행동으로만 전달된다. 그러나 참 사랑을 모르는 자식은 그 왜곡된 사랑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세상이 악하기만 한 이유도 세상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사랑이 있었더라면 예수님께서 첫째 계명으로 ‘사랑’을 내세우시지 않았을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사랑’을 잘 정의하였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3-7)
 
그러나 사랑을 알려면 가장 먼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기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은 남의 말을 무시하고 살아왔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에고를 없애버리지 않는 한 사랑을 알 수는 없다. 에크하르트가 ‘자신이 진리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나 명쾌한 정의 같다. 자신의 부모에게 사랑이 없다고 말하면 발끈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왜곡된 사랑이 참 사랑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정의를 위하여 남을 섬기며 살고 자기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 바보처럼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세상에는 사랑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삭막하기만 하다. 고통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도 없고 평화도 없다. 이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 세상이 너무나 슬프고 외롭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
예수님께서는 유다만 들으라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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