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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고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29 조회수584 추천수1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모성애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본능 그 자체다.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되는 길 어머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기에 여섯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오는 동안 더욱 더 진정한 의미의 어머니가 된 것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딸을 가슴에 묻고

나는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떠나신 후에야 당시 어머 니가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얼마나 큰 슬픔에 빠졌던가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이웃들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하고, 장례미사도 많이 집전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어머니의 주검을 내 손으로 직접 거두면서 더욱 더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통찰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 머릿속에서 헤아리는 죽음과 가슴으로 공감하는 죽음은 달랐다. 나는 비로소 어 머니가 부모님을 잃었을 때의 슬픔의 깊이를 이제야 가슴으로 이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세상에 홀로 남은 슬픔과 절망으로 세상이 무너지 는 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 었다. 하나밖에 없는 스무 살 된 남동생도 마음에 걸렸다. 외할아버 지 외할머니가 그토록 걱정하시던 외삼촌은 그때까지도 미혼이었 다. 어머니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외삼촌을 결혼시켜 독립시키 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마침내 좋은 혼처를 구하여 그 해 12월 외삼촌의 혼례를 치러 주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토록 염려하던 일을 어머 니가 성시킨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마지막까지 효 도를 다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하느님은 어머니에게 계속 시련을 주셨 다. 호우누님이 열두 살 되던 해인 1946년 7월 어느 날, 셋째 옥순 누님이 며칠째 배앓이를 하느라 먹지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집안일 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농사일도 일손이 모자랐다. 그날 외삼촌은 논 에 일하러 가고, 아버지는 여느 날처럼 우시장에 가셔서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밀린 일에 쫓겨 아픈 옥순누님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고 잔병치레가 없어서 옥순누님의 배 앓이도 가볍게 여겨 저절로 나을 줄 알았다. 그날 어머니는 보리 추 수가 끝나고 마당에 널어놓은알곡들을 골라내야 했다. 어머니는 힘 센 장정들도 하기 힘들다는 도리깨질에 여념이 없다가 문득 옥순누 님 생각이 났다. "호우야, 방에 가서 옥순이가 지금도 배가 아픈지 보고 오너라." 그런데 건넛방에 동생을 보러 간 호우누님이 마당으로 뛰어나오 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 옥순이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이상해, 눈동자가 희 끗희끗해!"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리깨를 집어던지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때 옥순누님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옥순아!" 어머니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무슨 일이야?" "옥순이가 예삿일이 아니다. 너 어서 논에 가서 외삼촌을 불러오 너라." 어머니는 호우누님에게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닫아 버렸다. 어린 딸에게 여동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옥순누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더니 결국 어머니 품안에서 눈을 감 고 말았다. 가엾게도 죽은 딸자식을 품에 안은 어머니는 내려놓지도 못하고 통곡만 할 뿐이었다. 당시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눈앞에서 자식의 죽음을 지켜본 어머니의 참담한 슬픔을 당해 보지 않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내 탓이다. 내가 널 죽였다. 네가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 는 것도 모르고 마당에서 도리깨질만 하고 있었다니, 세상에 도리 깨질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딴 짓만 하 고 있었다니. 제 탓입니다. 제 탓입니다. 하느님, 이렇게 큰 죄를 지은 엄마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 죄입니다.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우리 옥순이 대신 절 데려가십시오." 어머니는 통곡으로 거의 혼절하다시피 했다. 그때 서둘러 뛰어들 어온 외삼촌도 망연자실한 채 아무 말도 못했다. 호우누님은 여동생 에게 무슨 큰일이 벌어졌나 보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동생들 에게 밥을 차려 주고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말라는 어머니의 엄명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자식들이 옥순누님의 주검을 보는 일 이 없도록 철저하게 단속을 했다. "애들이 보지 않게 옥순이를 잘 감싸안고 나가야 한다." 어머니는 외삼촌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외삼촌은 죽은 조카 를 가마니에 싸서 옆구리에 끼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해질녘 땅거미가 서서히 밀려오는 시골길은 깊은 침묵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머니는 애끓는 슬픔을 속으로 삭이 며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어린 딸의 영혼을 하느님께서 기꺼 이 받아 주시도록 기도하며 외삼촌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일 년 남짓 짧은 생을 살다간 딸인데다가 사랑을 더 주지 못한 한 이 어머니 가슴에 사무쳐 왔다. 두 사람은 야산 후미진 곳에 서서 어 느 곳에 묻어 주어야 할지 막막해했다. 외삼촌이 어린 조카를 차마 땅에 묻지 못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누님, 여긴 야산이고 들짐승이 많아서 묘를 파헤치면 어떡해요." 어머니도 바로 그 생각을 하고 계셨다. "번듯하게 묘를 써주지는못할망정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불쌍한 우리 옥순이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된다. 안 되겠다. 다른 안전한 곳 을 찾아보자." "이런 외진 야산은 안 되고 사람들 발길이 잦아서 들짐승이 접근 할 수 없는 곳이라야 되지 않겠어요?" 외삼촌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어머니가 발길을 돌렸다. "창순네 밭으로 가자." 그래서 옥순누나는 창순네 밭 언저리에 묻혔다. 소 팔러 간 남편 은 딸자식 죽은 줄도 모르고 연락할 길은 없고, 남편 없이 자식을 잃 고 여우 산골을 피해 이웃집 밭에 자식을 묻고 온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생각을 하면 아마도 옥순누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커 다란 대못 하나를 박고 간 것이고, 어머니는 평생 지울 수 없는 멍든 가슴을 큰 상처로 아파하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엄마, 옥순이 어디 갔어?" 어린 것이 동생의 안부를 물었지만 어머니는 할 말이 없었다. 아 이들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어린 나이에 형제의 죽음으로 가슴을 멍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이렇게 둘러대셨 다. "옥순이는 아파서 병원에 갔다. 그리고 참 너희들은 창순네 밭 쪽 으로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된다. 알았느냐?" 다시 어머니의 엄명이 떨어졌다. 천진한 아이들은 옥순이가 병원 에 간 것이 창순네 밭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창순네 밭 은 여름이면 산딸기 넝쿨이 사방에 얽혀 있어 딸기를 따 먹으며 즐 겁게 놀던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옥순누님이 그곳에 묻힌 이후로 우리 형제들에게 그곳은 금지된 땅이 되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옥순누님 을 혼자 가슴속에 영원히 묻어 버렸다. 일 년 남짓 이 세상에서 숨을 쉬다가 간 인연이라고 하지만, 우리 삶이 일 년이거나 백 년이거나 세월의 길이와 마음의 무게를 한 저울에 잴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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