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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 자신을 알라” - 7.2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29 조회수539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2.7.29 연중 제17주일 열왕기 하4,42-44 에페4,1-6 요한6,1-15

 

 

 

 

 



“너 자신을 알라”

 

 

 

 

 


진리는,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나를 아는 것이 진리요 행복입니다.


나를 아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고

평생공부가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얼마 전 본원 원장님으로부터

본원 형제들의 8월 월피정 강론 부탁을 받고 몇 형제들이 모인 가운데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어느 형제의 즉각적인 대답이 참 신선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는 없습니다.


자신을 몰라 자기를 잊어 방황이요 불행입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모르는 게 자신입니다.


하여 제일 쉬운 게 남 판단하는 것이요

제일 어려운 게 자신을 아는 것이라 합니다.


자신을 몰라 남을 판단하지 자신을 알면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지난 밤 뜻밖에 어느 피정 자매가 제 집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두 권 주십시오. 선물하고 싶습니다.

  대금은 구좌로 입금하겠습니다.”

 


책에 사인을 해드릴 때 선물하는 마음이 참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선물 받는 사람도 ‘참 행복하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물을 받는 것보다 선물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큰 행복입니다.

 


언가 좋은 것이 있을 때 나누고 싶어 즉시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지요?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요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자신을 아는 길’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빌어라”입니다.

 


항구히 빌며 기도할 때 자신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빌면 화답송 기도 그대로

주님은 그 손을 벌려주시고 우리 원을 채워주십니다.

‘기도하다’보다는 ‘빌다’라는 순수한 말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분도회의 모토를 ‘빌고 일하라’로 바꾸면

단순해서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주께서는 비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신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빌다’의 뜻도 아주 직접적이고 풍부합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1(신이나 부처에게)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바라며 청하다,

2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간곡히 청하다,

3(남의 것을)거저 달라고 사정하다, 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는 속담도 있었고,

‘지성으로 잘못을 빌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로 풀이 되어 있었습니다.

 


‘빌다’라는 말이 참 좋은 데 결정적인 하나가 빠져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저 하느님이 좋아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개념이 없습니다.

빌라고 있는 두 손이요 일하라고 있는 두 손임을 깨닫습니다.


우선

찬미를 빌고 소원을 빌고 잘못을 빌고 필요한 것을 빌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빌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장 좋은 피서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아침찬미기도를 바치며 다음 시편 대목에서

참 좋은 피서법과 더불어 피한법을 알았습니다.

 


“불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라.

  추위와 더워야, 주님을 찬미하라.”

 


이열치열입니다.

온 마음으로 뜨겁게 바치는 주님 찬미가

더위를 식히는 최고의 피서(避暑)법이요,

겨울에는 추위를 따듯하게 덥히는 최고의 피한(避寒)법임을 알았습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 1독서의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간절히 빌었던,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분들이었습니다.


간절히 항구히 빌며 기도할 때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 평화와 일치의 사람이 되고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러 곧장 하느님과 더불어 자기를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분 이십니다.


그 분은 만물 위에 ,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이 하나를 잊어 분열이요 불화요 불안정입니다.


이 하나를 깨달아 알고

이 한 분이신 주님 안에 깊이 머물러 정주할 때 참 나를 압니다.

 

 

 

 

 




둘째, “나눠라”입니다.

 


나누는 삶에 항구할 때 자신을 알게 됩니다.

 


비는 사람은 나누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진위는 나눔으로 들어납니다.

나눌 때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나누면 모두가 부자로 살 수 있는데 나누지 못해 대부분 가난에 허덕입니다.

 

하느님은 충분한 선물을 주셨는데

나누지 않고 독점하기에 빈부의 차요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독점이 죄고 나눔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나눔의 사랑이십니다.

엘리사와 예수님을 통해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이 그대로 들어납니다.

 


“이것을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바로 이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나눌 때 기적입니다.

보리 빵 다섯 개와 햇곡식으로 백 명을 배불리 먹이셨으니 이게 기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은 엘리사를 훨씬 능가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들이 배불리 먹고

남긴 조각만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으니 말입니다.


모두가 성체성사의 큰 은총을 상징합니다.

 


도대체 이런 기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감동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작은 아이의 나눔의 사랑이 하느님을 감동시켰고

이어 군중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진 것 모두를 나눈 아이에 감동한 하느님이요 군중들입니다.

아마 제 먹을 것 이상 가진 이들은 아이의 나눔을 보며

자신의 욕심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감동과 군중들의 감동이 만나 일어난 기적입니다.


감동한 수많은 군중들은 마음을 활짝 열어

속 깊이 간직했던 먹을 것 모두를 꺼내어 나누니

먹고 남을 수뿐이 없었습니다.

 


나눔의 사랑입니다.

나눔의 기적입니다.

나누지 못해 가난이요 나누면 모두가 부자입니다.

나눌수록 풍요로워지는 삶에 참 나의 실현입니다.


존재는 개방이자 나눔입니다.

 

달맞이꽃들은 존재 자체로 아름다움과 향기를 나누고

배나무들은 가을이 되면 과일을 나눕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진선미를 나눕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갈수록 참 나가 되면서

존재자체로 주님의 진선미를, 주님의 신망애를 나눕니다.

 


주님 역시 이 거룩한 미사 중,

성체의 사랑으로 자신을 통째로 우리와 나눕니다.

 

 

 

 

 




셋째, “떠나라”입니다.

 


떠나는 삶에 충실할 때 자신을 압니다.

 


자신을 아는 이들이 떠날 때 잘 떠납니다.


빌 때가 있고 나눌 때가 있고 떠날 때가 있습니다.

떠날 때를 알아 잘 떠나가는 이가 지혜로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 삶은 부단한 떠남의 여정입니다.

안주할 때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안팎으로 부단히 떠나야 늘 새롭고 신선한 삶입니다.

분도수도승의 정주는 안주가 아니라

내적으로 부단히 떠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결코 군중의 인기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가 얼마나 덧없는 환상인지

대중의 인기의 정체를 꿰뚫어 본 분이십니다.


현세에 안주하며 환상을 쫓다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몸과 맘이 망가진 이는 얼마나 많은지요.


환상의 끝은 환멸과 허무뿐입니다.

오늘 날은 편리한 문명의 이기가 사탄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속화되어 속물이 되어 갑니다.

사탄은 인터넷을 통해 스마트폰을 통해 활개 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떠날 때 떠나는 절제와 분별의 지혜가 필요한 시절입니다.

 


“이 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시다.”

 


바로 이게 환상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수준입니다.

억지로 당신을 끌어내어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자

소리 없이, 자취 없이

혼자서 산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매력적입니다.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머물기 위해 떠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뭄과 떠남은 영적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충전하면 내 삶의 자리로 떠나야 하고

세상살이 중에 힘이 다하면 즉시 떠나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래서 피정이요 미사 참례입니다.

 

 

 

 

 


빌어야 합니다.

나눠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영적 삶의 여정이요 자신을 아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당신께 마음을 다해 비는 우리들에게 당신 은총을 풍성히 나눠주시어

세상 내 삶의 자리로 떠나보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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