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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머니, 행상을 시작하다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05 조회수529 추천수5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모성애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본능 그 자체다.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늘 가정의 기둥은 어머니다. 어머니가 큰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한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가정의 수호천사라는 사실을 나는 믿고 있다. 어머니, 행상을 시작하다

우리가 겪은 전쟁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 의 악몽이자 비극이지만, 당시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 가던 시절의 내가 성인이 되어 확인한 전쟁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 불길의 현장 속에서 우리 가족 모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우리가 피난 가던 그때 북한군은 서울을 함락한 지 한 달 만에 낙 동강 최후 방어선까지 밀어붙여 전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우리가 잘아는 대로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되었 고,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원산, 평양까지 접수하면서 통일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다시 소강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 과정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고 전쟁은 3년 10개월 만에 끝났다. 어느 쪽도 승리 없는 전쟁이 막을 내렸지만 우리나라 에는 씻을 수 없는 참혹한 역사로 기록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 국토는 폐허화되고 우리는 헐벗고 굶주리기 시작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족들은 생이별을 하여 그 고 통을 지금까지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가운 데 우리 가족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모두 무사했으니, 그것만으 로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귀가한 우리 집 역시 다른 집들과 다를 바가 없 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살지 않 으면 안 되었다. 아버지는 연세가 65세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우 시장에 나가 소장수를 계속 하셨지만 그 일은 소일거리로 용돈이나 버는 수준이었지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소장수 이종철' 이라고 불렀 다. 내가 1975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외 국인이던 본당 신부님은 "소장수 아들이 유학을 가는구나" 하고 말 씀하셨으니까, 우리 집은 소장수 집으로 통했다. 아버지가 계속 일을 하시기는 했지만 집안 형편은 나날이 어려워 졌다.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직접 장사라도 나서야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셨다. 아버지는 아녀자가 무 슨 장사냐고 펄쩍 뛰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별다른 수가 없었다. 결 국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장사를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처음 시작한 일은 인천에서 건어물 등 여러 반찬거리를 사다가 집에서 맛깔스럽게 양념을 해서 인근 마을을 다니며 파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반찬 행상을 시작한 것이다. 그 일도 아침에 일 찍 나가서 저녁 늦게 어둑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고단한 일과였다. 어머니는 농사지은 쌀이나 여러 곡식들을 자루에 담아 머리에 이 고 24킬로미터나 떨어진 인천 송림시장까지 가서 팔고, 돌아올 때 는 곡식 판 돈으로 반찬거리를 사서 다시 머리에 이고 오셨다. 우리 집에서 인천 송림시장까지는 왕복 48킬로미터, 그 먼 길을 비가 오 나 눈이 오나 걸어다니셨다. 어머니가 걸어다닌 지 4,5년쯤 지난 후에야 그 길에 시외버스가 운행되었지만, 버스 왕래도 잦은 것이 아니어서 어머니는 버스를 탄적도 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서 반은 걸어다니셨다고 들었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그 생각을 하면 지금 도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마을이 가까워 오면 배가 고파서, 얼른 집에 가서 고추장에 고추를 찍어 보리밥과 오이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절로 발걸음이 빨라지곤 했지." 나는 어머니가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집에 가서 보리밥 먹을 생각을 하면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는 그 소박한 어머니의 말씀이 눈물겹다. 나는 지금도 산이 좋아서 자주 산에 오른다. 하지만 내 걸음은 운동과 취미지만 어머니는 그 먼 길 을 무거운 짐을 지고 걸으셨으니 그 노동과 내 보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힘들다거나 짜증을 내신 적이 없다. 건강해서 이렇게 움직여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 며 늘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 3) 어머니는 이 성경 구절을 좋아하셨다. 그 말끝에는 으레 "우리야말로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에 신 앙을 주셨고, 가족들에게 건강을 주셔서 큰 은혜를 입고 있으니 진 심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성호를 그으셨다. 어머니의 기도는 이렇듯 늘 하느님께 대한 감사였다. 아침에 일어 나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셨고, 다른 식구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시간에는 속으로 기도문을 외우셨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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