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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08 조회수1,035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Mt.15,27-28)


제1독서 예레미야 31,1-7
복음 마태오 15,21-28

아주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면 마음이 열리는 기분입니다. 자연의 소리, 자연의 향기, 또한 자연의 멋을 보면서 우리들은 좋은 기분을 얻지요. 마치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그러한 자연 안에서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자연을 훼손하는 행동을 하면 나와 함께 하려는 자연에게 배신의 행동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자연과 소통을 합니다. 자연이 내게 “나는 네가 좋아.”라고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지만, 멋진 자연의 경관 안에서 우리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긴 자연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요즘에 애완견을 키우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보면 애완견과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십니다.

“우리 강아지, 기분 좋아?” “배고프다고?” “놀아달라고?”

사실 애완견이 말을 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지만 함께 살아가면서 애완견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이 주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또 자신에게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애완견과 내가 서로 소통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큰 억지가 아닐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믿기만 한다면 그에 걸맞은 선물을 항상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 자체를 먼저 거부하고서는 불평불만을 내세우는 데에는 항상 일등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부인과 스스로를 비교해보십시오. 이 가나안 부인은 도와달라는 청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이 아닌 오히려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지요. 그러나 불평불만을 던지지 않습니다. 또한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상황 같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이라고 외치면서 믿음의 끈을 포기하지 않지요.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 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이제는 주님께서 내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믿겠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소통은 나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키워나가시길 바랍니다.

 

“누가 비범한가?”보다 “어디에 비범성이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하워드 가드너).



오랜만에 비를 봅니다. 비오는 교구청 마당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
 

저는 스스로 강의를 많이 다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주 유명한 강사들처럼 한 달 내내 강의를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도 한 달 중에서 7~10일 정도는 특강을 하는 시간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저는 강의를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 많은 시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강의를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책도 많이 썼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출판했지요. 이것 역시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비해서 말도 안 되는 책을 출판했으니 많이 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를 아는 분들은 제가 마치 상당한 유명 인사처럼 생각하십니다.

전에는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잘 아는 지인을 만나러 갔다가 이 분과 함께 있던 분들과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안녕하세요? 조명연 신부입니다.”라고 짧고 인사했지요. 다른 분들 역시 짧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서로 인사했습니다. 그때 제가 아는 지인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이 신부님을 몰라? 빠다킹 신부라고 인터넷에서는 정말로 유명한데...”

솔직히 그렇게 유명하지 않습니다. 겨우 회원 수가 10,000명을 겨우 넘는 카페. 그리고 제 글을 매일매일 보시는 분들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저를 마치 정말로 몰라서는 안 되는 유명한 인사처럼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의 분위기가 어떠했을까요? 그곳에 계신 분들의 표정은 ‘빠다킹이 뭐야? 내가 알아야 되는 거야?’라는 것이었지요.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쓴다는 표현 ‘듣보잡’(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을 검색해보세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사실 정말로 유명하면 말하지 않아도 잘 알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기준을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기준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남의 기준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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