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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벽 6시의 기도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4 조회수631 추천수4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처음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쓰셨는데, 남에게 대필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독학으로 글을 익혀 편지를 쓰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 한 구절은 너무 소중하고 고마웠다.
사제의 어머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 찬우를 사제로 만들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 6시의 기도

어머니를 회상하면 기억나는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 서도 가장 자주 떠오르고 또 눈물을 적시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기 도하는 모습이다.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 났다. 나는 그런 지극하고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로 사제가 되었으 며, 지금까지 대과 없이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는 생활은 기도가 중심이었지만 내가 신학생이 된 이후로 는 거기에 덧붙여 '아들을 위한 기도' 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다. 신학생 시절 어머니의 기도는 항상 "주님, 부족한 저희 집안에 신학 생을 불러 주셔서 고맙습니다"로 끝을 맺었고, 내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후에도 "주님, 고맙습니다. 보잘 것 없는 저희 집안에 사제 를 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기도하셨다.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들은 말이지만, 어머니는 매일 새벽 6시에 맞춰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1975년 내가 신부가 되었 을 당시 우리 집은 통진 본당 양곡 공소에 속해 있었다. 통진 본당은 우리 집에서 4킬로 정도 떨어져 있어 매일 미사를 다닐 수 있는 상 황이 아니었다. 본당은 멀고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공소만 있을 뿐이라 매일 새벽 미사가 집전되지도 않는데 왜 어머니는 그 시간에 기도를 하셨는지 훗날 여쭤 보았다. 어머니는 신부가 된 아들이 매일 새벽 6시에 미 사를 봉헌하는데 어미인 내가 편히 누워 잠을 잘 수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미 사를 드릴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나마 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 는 생각으로 그 시간에 기도를 바치셨다는 것이다. 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는 그 시간에 기도를 계속하셨으리라. 그것이 자녀를 사제로 봉허한 모든 어머니들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그런 세심한 마음 씀씀이는 막내아들에게만 국한된 것 이 아니었다. 물론 부모님에게 편지로 제가 알고 지내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관심을 가져 주실 것을 부탁드리기도 했지만, 부모님 은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제나 수도자들을 마치 자식을 대하듯 따뜻 하게 대하셨고, 자주 찾아가는 일 또한 당연하게 여기셨다. 내가 로마에서 유학하던 1977년에 전교가르멜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때 스페인 수녀님 두 분이 처음 한국에 오시게 되었는데, 나는 그분들이 한국에 가시기 전 몇 개월 동안 한국말을 가르쳐 드리며 인연을 맺었다. 그 중 한 분이 암바로 수녀님이다. 수녀님이 한국에 와서 처음 어머니를 만나 나의 안부를 전하자, 어머니는 낯선 외국 수녀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멀리 타국에 가 있 는 아들 신부를 만난 듯 반가워하셨다. 그후 어머니는 시간이 날 적 마다 세를 얻어 살고 있는 수녀님들의 집에 자주 가시곤 했는데, 그 때 제철에 나는 나물과 감자, 고구마, 옥수수, 달걀 등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가셔서 요리법도 가르쳐 주고, 따뜻하게 위로의 말씀을 건네셨다. 암빠로 수녀님은 어머니를 만난 이야기와 우리 집 소식을 담은 편 지를 내게 보내 주시기도 했다. 나 또한 스페인 갈 기회가 생기면 꼭 수녀님의 집에 들러 한국에서의 수녀님의 생활을 전해 드렸다. 머나먼 외국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신앙으로 맺어진 후에는 가족 과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후로도 어머니와 암빠로 수녀님과의 교류는 계속 되었고, 로마에 있는 나에게 함께 편지를 쓰기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곤 했다. 어쩌다 바쁜 일정으로 수녀님과 만남이 어긋날 때에는 무척 안타 까워하시며, 얼굴을 못 봐 섭섭했다는 이야기를 담아 편지를 쓰시기 도 했는데, 그 편지를 읽으면서 어머니가 암빠로 수녀님을 대하시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암빠로 수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체구도 작은 어머니 가 늘 큰 짐을 머리에 이고 다니셨는데, 한번은 그 큰 보따리를 머리 에 이고 5층 아파트 층계를 걸어 올라오셔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내가 직접 본 광경은 아니지만 암빠로 수녀님의 눈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나는 가슴 한쪽이 울컥 저미어 왔다. 암빠로 수녀님은 지금도 한국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계시지만 우 리 집 대소사에는 꼭 참석하시고 늘 가족처럼 챙겨 주시며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나에게는 피를 나눈 가족과 다름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는 나와 관련된 여러 분들과 소중한 인연 을 맺게 되었다. 인천 성모병원(구 부평성모자애병원)에는 한국순교 복자회 수녀님들이 일하고 계신데, 내가 로마에서 귀국한 후에 허리 가 아파서 입원한 곳이기도 하고 당신도 입원한 적이 있는 병원이라 어머니는 그분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셨다. 시골에서 먹을 것이 생기면 병원 수녀님들에게 가져다 주곤 했는 데, 한번은 여름에 옥수수를 쪄서 식으면 맛이 없다고 비닐로 싸고 다시 보자기에 싸서 그것을 가슴에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녀오신 일도 있었다. 또한 내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있을 때에도 그곳에 계신 수녀님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어머니의 이러한 정성은 신앙인으로서 수도자에게 보이는 마땅한 존경과 애정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는 일이 자연스럽듯 아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애정을 쏟는 것 이 당연했던 것이다. 또한 곳곳에서 아들을 돕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신 또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길에 있다고 믿으셨다. 어머니는 편지에도 '거기 있는 여러 분들, 우리 신부님께 영적으로 나 물질적으로 도와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하세요'라고 써서, 얼굴은 몰라도 아들 편지에 언급되는 이들을 기억하며 늘 감사의 뜻 을 표시하셨다. 이렇듯 수도자들을 알뜰히 아끼시니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방문 하는 수녀님들이 많았다. 여느 때처럼 수녀님들이 방문하신 어느 날 이었다. 때마침 나도 집에 들러 함께 마루에 앉아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와 말투가 평상시와는 많이 달랐다. 보통 아버지를 부를 때는 '당신' 이라 하다가도 뭔가 맘에 차지 않 거나 핀잔을 주실 때는 '저 영감이', '저 늙은이가'라고 말씀하셨는 데, 그날은 아주 깍듯이 '당신' 이라고 부르면서 존칭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일에 가만히 계실 어버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우리 마나님께서 깍듯하게 예우를 갖추시오?" 아버지는 어머니를 은근히 놀리셨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무렇지 도 않게 응수하셨다. "당신을 보아서가 아니라 수녀님들을 보아서 내가 좀 점잖게 말하 는데 왜 그러시오? 존대가 영 익숙지 않아 부담스러우신가 본데, 다 시 영감태기라고 불러 드릴까요?" 어머니의 말씀에 자리에 있던 수녀님들은 물론 나까지 웃음이 터 졌다. 수녀님들은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만담을 듣는 기분이 들어 자꾸자꾸 뵈러 오고 싶어진다고 했다. 부모님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나를 보며 위트와 유머가 뛰어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 은 것 같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티격태격 하면서도 정이 깊으셨던 부모님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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