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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사랑 나물할머니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5 조회수445 추천수3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처음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쓰셨는데, 남에게 대필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독학으로 글을 익혀 편지를 쓰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 한 구절은 너무 소중하고 고마웠다.
사제의 어머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 찬우를 사제로 만들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사랑 나물할머니

점심 메뉴로 나온 냉잇국을 보니 어느덧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음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들에 나가서 직접 뜯어다 만들어 준 반찬이나 나물국같이 최고의 메뉴는 이 세상 에 없다. 오랜 세월 어머니의 나물을 먹은 탓에 나물이라면 모두 입 맛에 척척 붙는다. 봄이 되면 시골집에 있는 커다란 자루에는 산과 들에서 나는 나물들이 그득했다. 냉이, 씀바귀, 돌미나리, 부추, 취 나물--- 내가 나물 이름을 많이 아는 것도 어머니 덕이다. 봄이 지나고 난 후에도 어머니의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가을에 는 산에 가서 밤과 도토리를 주워 직접 도토리묵을 쒀서 신학교로 보내곤 하셨다. 동네 신자들 중에는 어머니의 대녀들이 몇 명 있었 는데, 그들이 나서서 어머니 손을 덜어 드리기도 하고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어머니 얘기를 들었는지 나물이 많은 곳을 일러 주거나 직 접 뜯어다 주곤 했다. 어머니의 막내아들 신부에 대한 걱정은 끝이 없었다. 1996년 오 십 가까운 나이에 인천 가톨릭대학교 교수가 된 이후에도 어머니는 그저 아들 신부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1994년 기공 식이 거행되고 1996년에 첫 신입생을 받았지만 모든 건물이 완공되 고 자리를 잡은 상황이 아니어서, 인건비 절약을 위해 학생과 신부 들이 돌을 나르고 잡초를 뽑고 마당을 다지는 등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식당도 없어서 신학생들이 공사 인부들과 함께 어울려 서 식사를 하곤 했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는 더욱 안타까워하셨 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봄이 오면 산과 들을 다니며 각종 나물을 뜯 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물과 야채가 어느 정도 모이면 와서 가져가 라고 전화를 하셨다. 1999년 내가 인천가톨릭대학교 총장 직책을 맡으면서 어머니는 더욱 바빠지셨다. 어머니 생각에 아들이 본당 신부일 때는 신자들이 신부를 돌봐 주고 사랑과 관심 속에서 기도를 받으며 살아가니까 걱 정이 없었는데, 이젠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총장신부가 학생들이며 교수들 다 먹여 살려야 하는 거 아닌가?" 어머니는 내가 그 많은 학생과 교수들을 전부 벌어 먹인다고 생각 하셨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때부터는 들에 나가는 것으로는 부 족해서 아예 뒤뜰에다 채소를 가꾸셨다. 집에 가 보면 커다란 그릇 마다 돌미나리와 상추 등이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 신부 에게 돈은 대주진 못해도 나물이라도 캐서 돕겠다는 것이었다. 매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캔 나물이 도착했고, 그 사연 을 알게 된 신학생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나물할머니' 라는 별명으 로 불리었다. 학생들은 나물할머니가 나물을 갖다 줘야만 비로소 봄 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내가 그 말을 전하자 어머 니는 무척 흐뭇해하면서 그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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