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소통의 대가(大家) 성모 마리아 - 8.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5 조회수51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8.15 수요일 성모 승천 대축일

 

요한 묵11,19ㄱ;12,1-6ㄱㄷ.10ㄱㄴㄷ 1코린15,20-27ㄱ 루카1,39-56

 

 

 

 

 



소통의 대가(大家) 성모 마리아

 

 

 

 

 


요즘 4-5년간 널리 회자되고 있는 말이 ‘소통’입니다.

바로 ‘불통의 시대’임을 반영합니다.


며칠 전 저는 청원자 수업 시간에 새삼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함께 사는 일이 어떻습니까?”

 

평소 모든 수사님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성실하게 잘 사는

청원자 형제이기에 저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듯 물어봤습니다.

 


“정말 어려워요.

  여럿이 함께 일하는 회사생활보다

  3-4명 수도형제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더 힘들어요.

  삶의 스토리나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그런지…”

 


이래서 인내의 수도생활입니다.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하여 안심했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고,

솔직하게 대답해준 형제가 고마웠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

저는 ‘소통의 대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소통은 생명입니다.

 


살기위해 소통입니다.

소통은 인간의 근본 욕구입니다.

소통이 잘 되어야 심신의 건강입니다.

 

소통이 생명과 빛이라면 불통은 죽음과 어둠입니다.

소통이 문이라면 불통은 벽입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공동체든

대부분 병이나 문제는 불통의 스트레스와 긴장에서 기인합니다.


요즘 어디서나 불통으로 아우성입니다.

소통이 이상이라면 불통은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영적도반 관계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소통의 대가들입니다.

이렇게 소통이 잘 되어야

충만한 행복, 충만한 존재, 충만한 의미의 삶입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답답하여 죽을 것 같기에

소통하여 살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의 영적도반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두 영적도반의 소통이 참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말 많이 한다고 대화 많이 한다고 소통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 간 예의와 존중, 신뢰와 감사, 공감과 배려가 전제될 때

평화롭고 자연스런 소통입니다.

 


행복은, 건강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소통 안에 있습니다.


소통이 원활할 때 성령 충만의 기쁨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뿐 아니라 태중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도 소통이니

이보다 더 좋은 태교도 없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바로 엘리사벳의 이 찬사가 소통의 절정입니다.

마리아는 감격에 벅차 곧장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수평적 형제들과의 소통에 이어

감사와 찬미의 기도로 수직적 하느님과의 소통이 뒤 따릅니다.


이런 소통이 있어야 공동체 안에서의 정주가 가능합니다.

 

 

 

 

 



소통은 노력입니다.

 

소통에는 왕도도 지름길도 없습니다.

소통은 세월을 요하는 인내입니다.



소통은 능력입니다.

 


누구나 똑같은 소통 능력이 아닙니다.

소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걸 인정하는 게 겸손입니다.

 

소통이야 말로 평생공부, 평생노력의 대상입니다.

소통의 한계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부단한 인내와 불퇴전의 용기로 나를 알고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느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하느님의 승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묵시록의 말미에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가 우렁차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 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이런 하느님 승리의 결정적 희망의 표지가 성모님의 승천이요,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내다보는 믿음의 눈이요,

이런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이

백절불굴의 자세로 소통의 노력에 항구하게 합니다.

 


구원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소통의 현실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를 떠나 선 구원도 행복도 없습니다.

불통의 현실에 좌절할 게 아니라 끝까지 소통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소통은 기도입니다.

 


기도 없이는 소통도 없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소통의 노력입니다.

수평적인 형제들과의 소통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와 더불어 깊어지는 형제들 서로간의 소통입니다.


오늘 복음의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소통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의 소통에 이어

즉시 찬미로 하느님과의 소통의 기도에 나섭니다.

 

소통의 중심에 소통의 대가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닮아 아드님 예수 역시 소통의 대가이셨습니다.

위로는 하느님과 옆으로는 이웃 형제들과의 소통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하느님과의 소통에 이어 형제들과의 소통이 일거에 해결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성모님의 승천도 바로 하느님과 소통의 절정을 상징합니다.

 


대부분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공동체에 문제를 두고 답을 찾기에

답을 찾지 못해 계속되는 혼란입니다.


하느님과의 부단한 기도의 소통 안에 저절로 내 안에 문제는 해결됩니다.


청원 형제의 수업 시간에

저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수업을 끝냈고 형제도 공감했습니다.

 


“함께 사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 사는 일이 수도(修道)입니다.

  함께 사는 일이, 서로 간의 소통이 수월케 하기 위해

  하느님의 일인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소통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잘 될 때 함께 사는 일도 수월해 지지만

  하느님의 일이 소홀해 질 때 함께 사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하느님과는 물론 이웃 형제들 간 막힌 것을 뚫어 소통을 원활케 해주는

공동기도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대부분 성인들이

소통의 대가요 달인들이었습니다.

 




소통은 생명입니다.

소통은 노력입니다.

소통은 기도입니다.

 




주님은 성모 승천 대축일에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은 물론 형제자매들과의 원활한 소통으로

성령 충만, 생명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