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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16 조회수834 추천수10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8월 16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Mt.18,21-22)


제1독서 에제키엘 12,1-12
복음 마태오 18,21─19,1

한 남자가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남자는 이웃에게 급히 돈을 꾸면서 기일을 어기면 두 배를 물어 준다는 각서를 썼는데, 이웃이 이를 악용해 곤란에 처하게 된 것이었지요. 즉, 남자는 이웃의 훼방으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고, 간신히 그 이웃을 찾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재판관이 묻습니다.

“당신은 기일 안에 돈을 갚지 못했소. 맞소?”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습니다.”

재판관은 “피고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사실 관계를 위해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시오.”라면서 주의를 줍니다. 이에 남자가 반문합니다.

“재판관님은 묻는 말에 ‘예, 아니요’로만 답하실 수 있습니까?”

재판관은 “당연하지요. 사실을 말하는데 다른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요?”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재판관님도 무조건 ‘예, 아니요’로만 답해주십시오. 재판관님은 요즘도 이웃의 창문을 몰래 엿보시나요?”

어떠했을까요? ‘예, 아니요’ 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엿본 적이 없다고 ‘아니요’라고 답하면 예전에는 봤다고 생각할 테고, 반대로 ‘예’라고 답하면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 아니요’ 라는 이분법적인 정답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하고 다양한 사연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정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 아니요’ 라는 단순한 판단으로 쉽게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던 지요. 그래서일까요?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사랑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어쩌면 상대방의 다양한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경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지요. 따라서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부족한지 완전수가 두 번이나 들어간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무조건 용서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어쩌면 내 자신도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섣부른 판단보다는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더 깊은 뜻을 찾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불완전한 존재의 기둥을 붙잡아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다(빈센트 반 고흐).



대학원 1학년 수련 마지막 파견 미사 직전에...



기억하기
 

인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학년에 재학중인 신학생들의 여름 프로그램이 어제 모두 끝났습니다. 한 달 간의 이냐시오 영신수련 피정, 일주일 동안의 도보순례, 한 달 동안의 농활수련. 이렇게 두 달 넘게 진행된 여름 프로그램을 어제 모두 끝마쳤지요.

마지막 파견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신학생들의 소감을 듣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과 함께, 저 역시도 한 달 피정을 마치고 저런 생각과 다짐을 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타성에 젖어드는 제 자신의 게으름을 다시금 반성하게 되었지요.

기억한다는 것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한 달 피정 동안 깊이 묵상하고 다짐했던 것들을 매순간 항상 기억하고 있다면 좀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잘 살 수 있을 텐데, 그 다짐들을 자주 잊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머리가 나빠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아닌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주님이 아닌 다른 세상의 유혹들에게 좋은 자리를 내주다보니 주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나의 관계를 더욱 더 친밀하게 해 줄 기억들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시간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매 순간 행복한 삶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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