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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20 조회수745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12년 나해 연중 제20주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복음: 요한 6,51-58







성체성사제정


 안젤리코 작, (1450), 피렌체 성마르코 박물관

 


     <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

 보리스 콘펠드 박사는 러시아에 살던 유대인 의사였습니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스탈린도 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말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의사로서 죄수들이 병을 핑계하지 않고 죽도록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게 하는 일과, 난치의 환자는 목숨을 연장하지 말고 죽도록 하여 경제를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의사의 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치료는 형식적, 기계적이 되어가며 의사로서 자신의 인간성이 철저하게 파괴되고 있음을 느끼고 절망의 바닥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 죄수를 통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수용소 내에 일종의 그리스도교 지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지금까지 기도를 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주님과 이웃에게 빚진 인생임을 알고 그때부터 최선을 다하여 환자들의 치료에 임하게 됩니다. 그가 너무 의약품을 낭비하고 필요 없는 사람까지 살린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있을 때는 사형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한번은 그가 장암 초기의 환자를 진료하게 됩니다. 물론 수용소 병원의 규칙은 그를 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용소 규칙을 어기고 그를 치료하여 살려냅니다.

그의 회복이 확실해 지던 어느 날 치료를 받던 환자는 왜 당신은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하면서 나를 살리려 합니까,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의사 보리스에게 던집니다.

보리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염려 마셔요. 이미 당신과 나를 살리고자 죽으신 분이 계시거든요.”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용히 미소를 흘리며 의사 보리스는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 의사 보리스는 이 사람을 살린 것이 알려져 공개 처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형되던 순간 보리스에게 생명을 받고 복음을 받은 그는 땅에 엎디어 흐느끼며 이런 고백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보리스, 알겠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의 최선을 바쳐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분의 이름을 전하겠습니다.”

그가 바로 1918~2008년 향년 89세까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연옥 1번지, 수용소 군도] 등을 집필해 197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뜻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 생명을 주시는 분을 말미암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혼자서는 절대로 존재하게 될 수도 그 존재를 유지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머니의 고통을 통하지 않고서 태어나는 자녀가 있습니까? 내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사 보리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절망과 우울과 무기력과 자존감이 박탈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맞아들인 이후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었고 이 삶은 희망과 활력이 넘쳤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보리스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되었고 솔제니친은 보리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솔제니친은 자신의 책을 통해서 많은 이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이번 올림픽 때 비닐하우스에 사시는 부모님께 새 집을 지어주겠다는 신념으로 금메달을 딴 양학선 선수가 있습니다. 그가 부모님께 새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한 것은 부모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훈련비로 받는 작은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서 부모님 통장에 넣어드렸습니다. 그만큼 절약하는 삶을 살게 만든 것도 부모님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부모님께 이젠 자신이 부모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양학선 선수를 살게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부모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도 가질 수 없었겠고 지금의 양학선이 만들어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사랑의 표현인 성체를 자주 영할수록 그 분께 대한 사랑이 더 커지고 그분을 위해서 살게 되며 그럴수록 내 자신도 온전한 사람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해 드린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해 드리겠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 6백만 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는데 최대의 장애가 되었던 것은 그들을 가스실에 집어넣어야 하는 독일군들의 양심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일은 고도의 심리전을 전개했습니다. 유태인을 짐승으로 전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을 죽이기는 힘들어도 인간모습을 한 짐승이라 생각되면 더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짐승처럼 여겨지면 그 때부터는 무슨 짓이든 양심의 가책을 덜 받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들은 유태인 수용소에 화장실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32천명이 수용된 곳에 하나의 화장실만을 지어놓았습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수용소의 문이 닫힙니다. 하루 두 번까지 화장실 가는 게 허용되었지만 일과 시간에만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서 한 없이 기다려도 제 차례가 오기 전에 문이 닫혔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매일같이 배변의 고통에 시달렸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식기와 깡통에 배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수용소는 온통 배설물로 악취가 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인간이기 보다는 동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씻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거기다 자신들의 식기에 배변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그들을 짐승처럼 보기 시작한 것은 독일군들이 아니라 먼저 유태인들 자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버티어 살아난 사람이 쓴 책에서 자신과 같은 몇몇이 극한의 상황을 견뎌내고 기적처럼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반잔의 커피 때문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430분이면 모두에게 한 잔의 따듯한 커피가 배급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악취를 풍기는 구정물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잠을 깨고 추위를 이기는 데는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중의 몇몇은 커피를 반쯤만 마시고 나머지 반으로는 얼굴을 닦고 옷에 적셔 이를 닦는 데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비웃어도 그들은 스스로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짐승으로 사느니, 사람으로 죽는 편을 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만이 결국 끝까지 살아남게 되었고, 짐승처럼 자신을 놓아버린 사람들은 병에 걸려 죽던 가스실에 들어가던지 더 빨리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반 컵의 커피는 마셔버리면 한두 모금에 불과하지만, 나를 짐승으로 만들 수도 또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는 최소한의 자존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짐승같이 살고 있는 우리들이 의미 있는 인간이 되도록 당신 자신을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창조 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담이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것과 같습니다. 의미 없이 어쩌면 짐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시는 이름을 듣게 되면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이웃의 이름을 불러줄 때 이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어 동물적 삶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분을 더 사랑할수록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그 분이 주시는 빵을 더 먹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빵인 성령님의 힘으로 사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빵을 먹고 나서 사랑과 감사가 흘러나오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하는 그 분의 빵은 그 분이 우리를 향해 사랑으로 주시는 희생입니다. 그 희생을 먹으면서 우리는 그 분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는 그 분을 위해 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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