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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월 21일 화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21 조회수803 추천수17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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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화요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대변혁의 세월이었던 20세기 초반 (1903년 8월 4일) 교황에 선출되신 비오 10세 교황님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못지않게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던 특별한 교황님이셨습니다.

 

    비오 10세 교황님의 정식 이름은 요셉 멜키올 사르토입니다. 그는 1835년 6월 2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오늘날 이탈리아 영토)이 트레비소 교구 내 리에세라는 작은 지방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슬하에 10남매를 두었는데, 사르토는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안 그래도 어려웠던 시절 10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부양하느라 부모의 등골이 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직업이 원래 구두수선공이었는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우체국 일까지 해서 ‘투잡’을 뛰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나니 사르토의 가정은 그야말로 찢어질 듯이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삯바느질이며 남의 집 농사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사르토는 매일 아침 6km나 되는 통학 길을 맨발로 걸어 다녔습니다.

 

    극도의 가난을 딛고 교황좌까지 오른 비오 10세 교황님이었기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참으로 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의 영성을 끝까지 온몸으로 살아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만토바 주교로 사목하던 시절 자신에게 당장 필요한 생필품마저 가난한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곤 했습니다. 교황에 선출되고 나서도 한때 자신이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떳떳이 사람들에게 밝히셨습니다.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하게 죽을 것입니다.” 교황직에 선출되고 나셔서도 청빈을 사랑하던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거창하고 화려하던 교황착좌식 미사와 행사를 ‘완전’ 대폭 간소화시켰습니다.

 

    1858년 9월 8일 사제로 서품된 사르토는 9년간 톰볼로 본당의 보좌신부로, 그 후 8년간 살차노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활동을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트레비소 대신학교의 영성지도 신부로 봉사했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했으며 누구보다도 극진히 교회를 사랑했고 사목적 열정으로 충만했던 사르토 신부는 1884년 11월 10일 만토바의 주교로, 1893년 6월 12일 베네치아 대교구 교구장 겸 추기경으로, 그리고 마침내 1903년 8월 4일 제257대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교황에 선출되면서 그가 내세운 모토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에페소 1장 10절)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십시오!”라고 외치며 교회 쇄신과 재건을 위한 찬란한 무대를 열었습니다.

 

    비오10세 교황은 그 어떤 선대 교황보다도 일을 사랑했던 교황이었습니다. 그는 새벽 4시에 기상해서 기도를 바쳤으며, 6시 미사, 그리고 8시에 하루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하루 일과는 톱클래스 연예인 저리 가라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견, 계속되는 회의와 연구, 틈새 시간을 이용한 독서와 집필, 그리고 기도로 하루 일과를 채웠습니다. 밤 9시 저녁식사를 마친 비오 10세 교황님은 결코 곧바로 침실로 향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는 또 다시 산적한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습관처럼 집무실로 발길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그 바쁜 와중에도 어린이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바티칸 내 성 다마소 정원에서는 삥 둘러앉은 어린이들 틈에서 문답식 교리를 지도하시는 비오 10세 교황님의 모습을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님께서 남긴 업적을 낱낱이 열거하자면 2박 3일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입니다.

 

    그는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일선 사목자인 사제들의 삶이 쇄신되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제 양성의 못자리인 신학교의 쇄신이 필요하였기에 대대적인 신학교 통폐합 작업과 신학교 수준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틈날 때 마다 잦은 고백성사와 잦은 영성체가 영성생활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신자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때 당시 얀세니즘의 영향으로 ‘그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죄인인 우리들이 어떻게 자주 모실 수 있는가?’ 더불어 ‘그 거룩한 성체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함부로 나눠줄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농후했습니다.

 

     그러나 비오 10세 교황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다 자주 성체를 영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위해 보다 자주 고백성사를 보십시오. 성체는 천국으로 가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에게 이 최고의 음식을 어떻게 나누어주지 못한다 말입니까”라고 외치며 당시 12세가 되어야 첫영성체를 하던 관습을 바꾸어 7세로 연령을 낮추었습니다.

 

    교회 전반에 걸친 쇄신이 그의 주관심사였습니다. 주교 임명 절차를 개선했습니다. 교회법 개정 작업을 통해 새로운 교회법전을 편찬했습니다. 성경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존의 성경을 개정했습니다. 성경 교육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성무일도를 시대에 맞게 개정 보완했습니다. 어린이 교리 교육서를 마련했습니다.

 

    11년간 교황직에 머무시는 동안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던 비오 10세 교황은 1914년 8월 21일 얼마 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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