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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공동명의로 낸 봉헌금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29 조회수537 추천수2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네요. 하늘이 무슨 값이 나가나요? 당신이 헐값에도 안 팔리는 하늘이라면 난 금싸라기 땅이에요.
한 지붕 한 마음으로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둔 밥 한 그릇, 그것에는 사랑한다는 천 마디의 말보다 더 깊은 사랑이 숨겨져 있다. 나는 그 밥그릇을 셀 수도 없이 받았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것인가. 공동명의로 낸 봉헌금

부모님이 다니시던 양곡성당을 새로 지을 때의 일이 다. 양곡성당은 1987년에 설립되어 1988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였 다. 요즘도 본당의 신자가 늘어나서 이웃으로 분가하는 성당들이 많이 있다. 그때마다 십시일반 신자들의 손때 묻은 돈을 모아 성 당을 짓게 되지만, 양곡성당도 신자들의 정성이 필요했다. 하지만 워낙 경제 사정이 어려운 시골 성당이다 보니 신자들의 살림도 넉넉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어디서 도와 주는 곳도 없었다. 결국 신자들은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농사지은 것을 팔아서 한 푼 두 푼 모아 성당을 지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성당 신축기금을 내기 위해 산과 들에서 나물을 뜯어 인천 송림시장에 내다 팔아 모은 돈을 건축 헌금으로 낼 계획이었 다. 다른일도 아니고 새 성당을 짓는 헌금을 만들어 줄 나물이니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정성스레 나물을 다듬고 손질하고 계셨는데, 아버지가 궁금했는지 어머니 곁에 와서 물으셨다. "이번에는 돈을 어디에 쓰려고 그렇게 야단법석이오?" "성당 짓는 데 봉헌금을 내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 그럼 나도 거들어야지." 그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물에 손을 대셨다. 어머니와 함께 나 물을 다듬은 아버지는 그 나물을 흔쾌히 자전거에 싣고 어머니를 시외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셨다. 사실 아버지는 평소에 어머니 를 자전거에 태워 주시는 법이 거의 없었다. 물론 그날도 어머니는 버스정류장까지 자전거를 태워 달라는 부 탁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선뜻 도와 주시니 마음 이 참 흐뭇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시외버스정류장에 도착한 아버지 는 은근히 생색을 내셨다. "건축헌금은 당신 이름으로만 봉헌하면 안 돼요. 꼭 공동 명의로 해야 돼요." 당신도 나물 파는 데 한몫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어쩐지 왜 도와 주나 싶었는데, 그런 속셈이 있었구나.'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시고 대답했다. "아니, 지금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안 하고 공짜로 세끼 밥을 드 신 분이 새삼스럽게 웬 생색을 내려고 그러세요? 앞으로도 그럴 맘 이라면 큰 오산이지!" 그리고 어머니는 얼른 버스에 오르셨다. 하지만 말씀만 그렇게 하셨지 후에 두 분의 이름을 나란히 올려 봉헌금을 내셨다고 한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장에 가시는 어머니를 태워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버스 타러 큰 길로 나갈 때나 혹은 시장에 갈 때 어머니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가 시는 일이 많았다. 양곡성당 봉헌금을 계기로 어머니도 드디어 아버지 자전거의 덕 을 보게 되신 것이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사이좋게 달려가는 모습 을 볼 때마다 두 분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 이후에는 아버지도 자전거를 더 이상 타지 않으셨다. 자전거 친구도 없고 장에 갈 일도 없으니 영 마음이 허전하신 까 닭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가 가신 후 마음 곁이 없어서 그런지 노환 이 심해지셔서, 체력적으로도 자전거를 타기에 무리시다. 나에게는 아버지와의 잊지 못할 자전거의 추억이 있듯이, 아버지 역시 어머 니와 자전거에 대한 추억이 깊으셨다. 우리에게 그런 추억의 그림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것은 단순한 기억의 현상을 넘어서 따뜻한 정겨움과 그리움으로 되 돌아온다. 가족들은 어머니가 거동을 못하시면서부터 40년 가까이 두 분이 살아온 정든 집을 떠나 읍내에 있는 작은형님 내외가 모시 게 되었다. 큰형님은 서울에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 며 칠씩 머물곤 했지만 답답하다고 성화를 하셔서 다시 모셔왔다. 그러다가 둘째 형님댁마저 시장 개발로 인해 집이 헐려 임시 거 처를 찾았지만 시골이라 마땅한 집이 없어 방이 둘밖에 없는 집으 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부모님을 모시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 었다. 그때 마침 큰누님이 직장을 고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 을 모시겠다고 하여 검단에 집을 마련하고 모시게 되었다. 시내로 이사를 하면서 아버지는 40년 이상 타던 자전거를 놓게 되셨다. 일 년 반 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아버지는 더 이상 그곳에 계시고 싶지 않았는지 당신이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셨다. 그래야 동네 친구들도 만나고 신자들과도 자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인 것 같다. 아버님은 지금 거동도 불편하고 기력도 없으셔서 집에만 계신다.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말을 타고 활을 쏘던 강골의 아버지가 이제 약해지신 모 습을 볼 때마다 자식으로서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큰누님도 칠순이 넘었는데 아버지 수발을 드셔야 하니, 나무의 한 가지에서 태어난 형제이면서도 그저 누님에게 일을 미루 고 있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이제 가능한 한 자주 찾아뵙고 기도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 어릴 적 아버지가 넘어진 나를 부축해 주셨던 것처럼, 주님께서 아버지 가 남은 생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감싸주시기를 빌어 본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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