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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13일 목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13 조회수748 추천수14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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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 목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 루카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것 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나는 끝까지 달렸습니다>

 

 

    오래전 유럽 어떤 교구에서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겨웠는지, 이런 식으로 계속 할거면 강론을 없애자는 제안서가 교구 신자들에 의해 교구청에 전달되기도 했답니다.

 

    저도 가끔씩 듣게 되는 잘 준비되지 않은 강론, 그날 성경말씀의 주제와는 관계없어도 너~무 관계없는 강론, 담화문 낭독식의 강론, 신자들과의 교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방통행식 강론, 이야기가 계속 가치를 쳐 원줄기로 돌아오지 않는 길고도 긴 강론을 들으면서 때로 강론도 고문, 혹은 폭력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강론의 당사자들인 저희 사제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한 지역에서 한 1년만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다보면 할 말 안할 말 다 해버려 강론소재가 즉시 바닥납니다. 또 신자들이 ‘말빨’이 센 명강사들에게 몰려다니면서 좋은 말씀에 귀가 높아져 웬만큼 준비해서는 씨알도 안 먹힙니다.

 

    어떤 때 재미있게 해보려고 괜히 한번 오버했다가 잘 먹혀들지 않으면 괜히 그랬어, 하는 마음에 밤잠까지 설칩니다. 본당 사제들 하루 일과는 또 얼마나 벅찹니까? 미사 집전하고, 성사 드리고, 면담 좀 하고, 이 회의 저 회의 참석하고 나면 어느새 늦은 밤입니다. 내일 아침 강론 준비하려고 솜처럼 지친 몸을 컴퓨터 앞으로 당겨보지만 머릿속이 하얗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너무나 큰 의미가 있고, 큰 기여를 하기에 제1순위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삶은 우리 모든 사제들에게 큰 의미와 모범으로 다가옵니다.

 

    그의 강론이 얼마나 명쾌하고 감동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설교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설교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꿨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으며 법률과 철학,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안티오키아 학파 타르소 에오도로에게서 신학을 배웠습니다. 369년 세례를 받았고 371년 바실리오 성인의 문하생이 되어 수도생활을 맛보았으며, 381년 부제, 386년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390년부터 명강론가로 활동하였는데,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가 다시 환생하셨나? 할 정도로 다방면에 탁월했던 그의 명성은 즉시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398년 황제의 간곡한 부탁으로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주교로 임명된 그는 즉시 성직자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그릇된 생활 습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우상숭배와 비윤리적인 생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사치와 권력의 남용을 단죄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특별 헌금 제도를 마련하였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강론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구름 잡는 식의 애매모호한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펼쳤던 강론의 특징은 반복과 비약, 날카로움, 균형감각,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청중을 압도하고 몰입시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눈물로 인해 자주 설교가 중단되곤 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때로 쌍날칼보다 날카로워 나누지 않는 부자들을 즉시 불안하게 만들었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백성들에게는 큰 위로와 평화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복잡한 대도시의 주교가 됨으로 인해 겪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자로서 극단적 청빈생활과 티 없이 맑은 수행생활을 추구했던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에게 갖은 암투와 중상모략, 권모술수가 판을 치던 대도시의 주교직은 너무나 큰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포부를 펼쳤습니다. 왕실의 부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물 좋은 자리에 않기 위해 뇌물을 상납한 주교들을 가차 없이 면직시켰습니다.

 

    워낙 강경한 노선을 고수했던 크리소스토모 주교였기에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는 황실과 반대파 고위성직자들에 의해 파문되어 2차례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238통이나 되는 보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407년 9월 14일 유배지에서 선종했습니다.

 

    유배를 떠나기 전 남긴 말씀입니다. “나는 성전(聖戰)을 치러 냈습니다. 달려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고행과 관련해서 이런 말씀도 남겼습니다. “철야기도나 단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불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고행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을 점점 더 불타오르게 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 있는 것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넘실거리는 큰 파도와 높은 풍랑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를 삼켜 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아무리 화를 낸다 해도 그리스도의 바위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파도가 큰 탑처럼 하늘 높이 치솟는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배를 삼켜 버릴 수는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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