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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염전을 지날 때마다 그 아이 울음이 기억난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17 조회수370 추천수0 반대(0) 신고
         염전을 지날 때마다 그 아이 울음이 기억난다
                      27년 전 작가 이환경씨와 ‘죽도’에서 만난 그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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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이나 어린이들을 유난히 예뻐하는 성격이다. 엄마 품에 안겨 있거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을 보면 어떻게라도 관심을 표해야지 그냥 무심히 지나치지 못한다. 유치원생 정도의 여자아이 볼을 토닥거려 줄 때는 집사람이 지금 세상에서는 ‘오해를 살 행동’이라며 주의를 주기도 한다.

총각 시절 옆집 어린아이를 유별나게 예뻐해서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남의 집 애기도 저렇게 예뻐하니, 장가들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 볼이 남아나지 않겠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 청년 시절 마산화력발전소에서 일을 할 때는 하숙집의 걸음발타는 아이를 틈만 나면 안고 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내 아이인 줄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기들에게 관심을 표하고 예뻐할 때는 옆구리가 결리는 것 같은 현상을 겪기도 한다. 아기들을 예뻐할 자격이 과연 내게 있기나 한 걸까? 묘한 자과감이 자맥질을 치곤 한다. 일종의 죄의식이고 후회일 것도 같다. 조금은 비밀스러운 그런 게 내게는 있다.



▲ 염전 / 태안군 남면 진산리에 있는 염전이다. '장명수'에 속한 염전이므로 내가 종종 접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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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미사’에 참례하는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요즘도 거의 매일 오후에는 걷기운동을 한다. 집에서 10리 상간인 ‘장명수’를 주로 간다. 태안군 태안읍과 근흥면과 남면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개펄 포구다.  

장명수를 가는 길은 대략 세 갈래인데, 한 갈래 길은 염전 옆을 지나야 하고, 한 갈래 길은 염전 옆을 지나지 않지만 염전이 훤히 보이는 길이고, 한 갈래 길은 염전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대개는 염전이 보이지 않는 길을 밟는다. 하지만 간혹 염전 옆길이나 염전이 훤히 보이는 길을 밟기도 한다.

간혹 염전 옆길을 밟는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어려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밟노라면 초등학생 시절 망둥이 낚시를 하러, 혹은 고등을 잡거나 대합을 캐러 장명수를 다녔던 아련한 추억들이 바로 어제인 듯 훤히 눈에 밟히기도 해서 꿈길인 듯싶기도 하다.

하지만 염전을 보노라면 불현듯 한쪽 옆구리가 결리는 것 같은 현상을 감내해야 한다. 한 가지 지울 수 없는 기억 때문이다. 그것 역시 일종의 죄의식이고 후회스러움일 것 같다. 그런 비밀 같은 것이 내게는 있다.

<2>



▲ 이원방조제 초입에서 본 ‘죽도’ / 태안군 이원면 포지리 쪽, 이원방조제 초입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섬이 ‘죽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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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훗날 드라마작가로 대성하여 이름을 날리게 되는 이환경씨가 가끔씩 ‘전설의 고향’ 같은 단막극을 집필하면서 <건강생활>이라는 잡지의 기자 노릇을 하고 있을 때였다. 르포 기사를 만드는 일로 태안엘 온다고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그를 맞아 우리 집에서 점심 대접을 했고(그때만 해도 음식점이 아닌 살림집에서 손님대접을 하는 게 보편적이던 시절이었다), 기꺼이 그에게 동행을 해주었다. 그 친구가 취재를 하려는 곳은 태안군 이원면의 ‘죽도’라는 섬이었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을 가진 섬은 우리나라에 꽤 많은데, 태안군 이원면 포지리에도 죽도라는 섬이 있다. 말 그대로 ‘대나무섬’이다. 참대나무가 많은 태안군 이원면의 죽도는 현재 섬이 아니다. ‘이원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육지가 되어 버렸다. 섬의 형태와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이제는 ‘육지 안의 섬’인 셈이다.

옛날 바다 가운데 있었던 죽도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썰물로 물이 빠지면 섬이 아니고, 물이 들어오면 섬이 되는 그런 섬이었다. 그 섬에는 육지를 오가는 배가 필요 없었다. 물이 빠지면 그대로 육지와 연결되니 주민들은 썰물 때 갯벌을 밟고 육지를 왕래하곤 했다. 갯벌 길을 경운기도 다니고 자동차도 다니고 했다.    

그 섬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여섯 가구가 산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 외지로 나가고,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서 그 섬을 지키고 있다.



▲ 이원방조제 희망벽화 / 이원방조제 전체에 그려진 ‘희망벽화’.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 사고가 수습된 후 이듬해인 2009년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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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건강생활> 기자 이환경씨가 그 섬을 찾은 것은 썰물 때는 육지가 되는 그 섬의 특징과 그 섬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취재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월간 <마당> 등에 르포 기사를 쓴 경력이 있는 나로서는 그의 취재를 도와줄 수 있는 처지였다.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여 이원면 포지리를 갔고, 썰물 때 갯벌 길을 걸어서 죽도를 갈 수 있었다. 이환경씨는 섬의 이모저모를 카메라에 담았고, 주민들을 만나 여러 가지 궁금 사항들을 취재했다. 내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섬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등성이를 넘어갔을 때였다. 산기슭 외진 곳에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아기울음소리가 계속적으로 들렸다. 그 집에 가서 보니, 남자 노인이 한 분 방 안에 있는데,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냥 속수무책으로 멀거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 노인에게는 아기 울음을 그치게 할 아무런 방도도 없는 것 같았다.  

아기는 엎칠 줄도 모르고 팔다리를 버둥거리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였다. 그저 애달프게 울음소리만 내는데, 배가 고파 우는 것임을 우리는 단박 느낄 수 있었다. 우리도 속수무책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말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근처 어딘가에 엄마나 아빠, 또는 할머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동이라도 제대로 하는지 모를 노인에게 갓난아기를 맡겨두고 다른 어른들이 멀리 갔을 리는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런 말로 서로를 위안하며 그 집을 나왔다. 다시 등성이를 넘어간 우리는 여러 집이 이웃해 있는 곳에서 만난 주민들에게 등성이 너머 갓난아기가 있는 집의 형편을 물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듣게 됐다. 그 갓난아기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었다고 했다. 초산이었던 엄마는 산고가 지나쳐서 아기를 낳고는 곧 죽었다는 것이었다.



▲ 태안화력본부 가는 길옆의 ‘죽도’ / 오른쪽 옆으로 ‘죽도’를 끼고 뻗은 아스팔트 길 끝에는 태안화력본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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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염부’라고 했다. 염전 일을 해서 겨우 먹고사는 사람인데, 오늘도 염전 일을 하러 갔을 거라고 했다. 할머니도 있는데, 육지로 품을 팔러 갔을 거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너무 늙어서 굴신도 제대로 못하고 잘 듣지도 못한다고 했다.

주민들은 그런 얘기를 예사롭게 했다. 딱한 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별로 심각한 표정들은 아니었다. 등성이 너머에 있는 그 집의 딱한 사정을 잘 알면서도, 주민들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배고파 우는 갓난아기를 그대로 두고 돌아가야 할지, 그냥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그저 막연하고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밀물이 시작되었음을 생각해야 했다. 물이 들어오면 길이 막혀서 섬 안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도 우리에겐 중요했다. 우리는 그것을 핑계 삼고 곧 죽도를 떠나게 되었다.

<3>

갯벌 길을 밟고 섬을 떠나올 때 나는 배고파 우는 갓난아기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 갓난아기가 일단은 배가 고파 우는 거지만, 그건 엄마를 찾는 울음이기도 할 터였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그 아기의 처지가 너무도 애처로워서, 오늘의 이 일이 평생 동안 내 기억에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의 그 생각처럼 나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그 아기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들을 보면 으레 죽도의 그 아기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염전 옆을 지나며 염전에서 일을 하는 염부들을 보노라면 또 그때 일이 떠오르곤 했다.

그때로부터 정확히 27년이 지나고 있지만, 나는 오늘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한다. 아기들을 보지 않거나 염전 옆을 지나지 않는 때라도, 드라마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이환경씨의 이름을 들으면 또 으레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 육지 안의 섬 이원방조제 / 건설로 방조제 안쪽에 위치하는 죽도는 이제 ‘육지 안의 섬’이 되었고, 섬의 형태와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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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에 이환경씨의 전화를 받았다. MBC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무신>의 원고 집필이 끝나면 9월 중에 나를 보러 태안엘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통풍환자였던 그는 특별한 약을 써서 통풍이 완치되었다고 했다. 방송국 사람들 중에는 통풍환자도 많은데 자신이 비방을 알려주어서 완치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며 그는 자신이 다시금 그 약을 구해 가지고 내게 오겠다는 말도 했다.

청년 시절 공사판에서 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글공부를 하게 됐고, 소설은 자신이 없다며 KBS 작가 양성소로 발걸음을 한 덕에 드라마작가로 대성을 했으니, 그 친구에겐 내가 어느 모로는 은인일 터였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한 것도 아니고 그 친구가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 스스로 그런 약속을 했으니, 나는 그 친구가 불원간 그 약속을 지킬 것으로 믿는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린다. 그 친구의 통풍을 완치시켜 주었다는 비방 약도 기다려지지만, 그 친구를 만나게 되면 27년 전의 ‘죽도’ 얘기도 꺼내 볼 생각이다. 그 친구도 나처럼 그 날의 그 일을, 배고파 울던 그 갓난아기의 애달픈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12.09.17 10:09l최종 업데이트 12.09.17 10:09 l 지요하(sim-o)
태그 : 태안군 이원면 포지리 '죽도', 이환경 작가, 이원방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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