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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스라엘 광야 40년 그 원인(2부)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18 조회수439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주님의 용서와 벌 그리고 백성의 만용(2부)

 

만용의 사전적 의미는 분별없이 함부로 날뛰는 용맹이라고 합니다.

 

어제 1부에서 여호수아와 칼렙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왔던

사람들이 그 땅에 대하여 몹시 나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맞는데, 문제는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약하고 그들은 크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처음부터 알고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자신들이 바랬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점차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바라보기보다 자신들의 현실적인

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헤메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칼렙을 빼고 나머지 10명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하였으나 회개하지 않고 공동체로 돌아가

자신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그대로 공동체에 전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온 공동체가 그들과 똑같은 상태로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벌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재앙을 받아 죽었습니다.(민수 14,37)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퍼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들이 그렇게 죽은 것을 슬퍼한다는 말인가하고

생각했으나 다음 내용을 보면 그 슬픔과 다른 슬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떤 슬픔을 말하는가?

저는 학자가 아니라서 원문에는 어떤 의미가 쓰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묵상 차원에서 이해한 슬픔입니다.

 

이와 비슷한 슬픔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1-22)

 

성경에 이 슬퍼하다라는 단어가 같은 의미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가 묵상한 대로 나눔을 하겠습니다.

 

먼저 모세에게 10명의 사람들이 재앙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한 말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음 날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자, 우리가 잘못하였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으로 올라가자.' 하면서, 산악 지방의 고지대로 올라갔다."

고 합니다.

 

"주님께서 다음 날 아말렉족과 가나안족이 골짜기에 살고 있으니, 너희는 내일

발길을 돌려 갈대 바다 쪽 광야로 떠나라."(민수 14,25)고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슬퍼했다던 백성들의 말을 묵상해 보면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인정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건 말뿐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슬퍼했다는 백성들의 입장에서 묵상해 보면 슬퍼한 것이 과연 무엇일까?

10명이 그렇게 죽었다는 그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밤새 잠 안자고 생각해 보아도 현실은 그 10명의

말이 맞는단 말이야!"라고 죽은 그 10명의 의견에 따르고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고백한 "우리가 잘못하였으니"가 진심이었다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모세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쩌자고 주님의 분부를 거스르느냐? 이 일은 성공하지 못한다."

(민수 14,41) 주님께서 분명 다음 날 떠나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분부를

어긴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모세가 그 답을 말해 줍니다.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지 않으니, 너희가 적에게 패배하지 않으려거든

올라가지 마라."(민수 14,42) 이 말씀을 의미는 탈출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 13,21-22)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주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진영의 출발과 멈춤은 불기둥이

먼저 출발하면 진영도 출발하고, 불기둥이 멈추면 이스라엘 진영도 멈춰야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입으로는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불기둥이 먼저 움직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산악 고지대로 올라간

것입니다.

 

불기둥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으니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세가 말해 주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답을 이렇게 말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계약 궤와 모세가 진영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만용을 부려 산악 지방의 고지대로 올라갔다."(민수 14,44)

모세는 주님께서 불기둥으로 싸인을 주셔야 떠나는 사람이므로 그가 진영을

떠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직 떠나라고 불기둥으로

싸인을 주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다 죽지 않은 것이 어쩌면 은총이고 자비일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산악 지방에 사는 아말렉족과 가나안족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쫓아 버렸다."(민수 14,45)

 

지리적으로 어떤 사정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씀은 그들이 왔던 길에서

이집트 쪽으로 아주 많이 돌아갔다는 의미로 묵상해 봅니다.

이집트로 상징되는 하느님 없이 고생하는 삶으로 많이 되돌아간 그들의

영적 상태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입으로 한 말 그대로 된 것일 것입니다. 그들의 말입니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그러면서 서로 '우두머리를 하나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하고

말하였다."(민수 14,1-4)

 

이스라엘이 또는 우리들이 왜 이런 불신앙의 삶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하늘)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현실(땅)만 바라보고 그 바라본 결과로 실망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믿어지면 소망하게 되고 소망하기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살 수 있을까를 알려 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들아,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주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그분께서 네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 주시어

네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는구나."(시편 103,1-5)

 

주님을 찬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 시편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그동안

내가 주님께 받은 은총을 낱낱이 기억하게 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하나도 빠짐 없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길이

기도외에 또 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또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무서운

재앙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도 그런 만용을 부리나?

 

그만큼 자신들의 생각의 방향을 바꾸기(회개)가 어렵고 힘들다는 의미로

묵상해 봅니다. 자신의 생각 또는 뜻을 내려 놓으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용을 부립니다. 일명 그 만용을 우리는 이렇게 부르지요.

"배치기!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자신이 생각한 내용이 옳다고 한 번 결정되면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껏 배를 앞으로쑥 내미는 것을 배치기 한다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행동은 지금을 사는 우리들도 하고 살아갑니다.

물론 저도 그 사람 중에 하나 입니다. 그러니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배를 한껏 내밀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세가 말한대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민수 14,42)

 

더불어 신약성경에서 보여주시는 젊은 부자 청년이 슬퍼하며 떠나간

그 슬픔을 무엇인가도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그 젊은 청년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알았을까요?

알았다해도 믿었을까요?

 

알았을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물었기에 영원한 생명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보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알기는 했으나 믿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그런 만용을

부렸듯이 이 젊은 부자 청년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 또는 뜻을 내려 놓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떠나는 모습이 구약의 오늘 묵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용을

부린 것과 다르지 않다고 묵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한 슬픔과 젊은 부자 청년이 슬퍼한

슬픔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 묵상입니다. 그 슬픔은 내 뜻과 내 생각과

하느님의 뜻과 같지 않아서 슬픈 것입니다.

 

하느님과 내 뜻이 맞지 않으면 내 뜻을 내려 놓으면 되는 것을 그것이

슬퍼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들의 기도

지향대로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고 얼마나 슬퍼하고 살아가는지요?

그러면서 그들과 똑같이 배치기(만용)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하고 맙니다.

 

현대의 우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교회를 떠납니다.

이제 우리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맙시다.

내 생각과 내 뜻을 내려 놓으면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은 저의 개인적인 묵상입니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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