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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19 조회수786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2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Lk.31-32)


제1독서 1코린토 12,31─13,13
복음 루카 7,31-35

정말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사실 정리정돈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책상 주변으로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를 못합니다. 소위 성공하는 사람들은 정리정돈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저는 아무리 정리를 해도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제 동창신부가 제 방에 들어오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이 방이 깨끗하게 보이지?”

저의 정리 못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창신부인데 이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방을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계속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저는 원래 이렇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바뀐 것 하나도 없어. 원래가 이랬어.”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사실 바뀐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시간을 내어서 바로 많이 버렸습니다. 잘 쓰지 않는 낡은 물건들을 구석에 모아놓기 보다는 과감하게 버렸거든요. 버리고 나니까 따로 청소를 한 것도 또 정리정돈을 한 것도 아닌데도, 사람들이 제 방에 와서는 깨끗하다고 또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정리정돈의 비결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리정돈은 청소를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 아니 더 근본적으로 보면 물건을 사 모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정돈을 잘 하는 사람들이 성공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조금 알겠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물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일이 아닌 다른 것들에 집착하고 간섭하기 바쁘다 보니 어떻게 성공의 길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우리들이 이 세상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역할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면서 세상의 다른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의 일에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불어 주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아이 같다고 하지요. 즉, 웃고 즐길 때에는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있으며, 울며 슬퍼할 때에는 오히려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만을 내세워서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지요.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향해서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에 마귀가 들렸다고 말하고, 반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향해서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을 전혀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버려야 깨끗해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과감하게 버려야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최악처럼 보이는 순간은, 직접 시험해 볼 최고의 시간이자 최적의 시간이다(어니스트 홈즈).



어제 성소후원회 회원들로부터 받은 영적예물. 잘 살겠습니다.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어제 새벽 묵상 글에도 썼지만, 저는 그저께 태풍을 뚫고 고속 기차를 타고서 전주 교구청으로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고속 기차가 전주역에 도착했을 때, 비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었기에 버스보다 택시를 타고서 교구청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분이 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즉, 평화방송에서 저를 봤다고 너무나도 반가워하시더군요. 그리고 택시 안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드디어 교구청이 보였고, 저는 점심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를 하고 들어갈 생각으로 입구에 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형제님께서는 “신부님, 이렇게 비바람이 불어오는데 신부님 불편하게 입구에서 내려드리면 안 되지요. 제가 신부님 강의하시는 교구청 건물 입구 앞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불편해하지 마세요.”라면서 교구청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올라가지 말고 입구에서 내려달라고 했지만, 이 형제님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를 쫄딱 맞으면서 다시 걸어내려올 수밖에 없었지요.

이 형제님은 저를 배려한다고 이렇게 하신 것이었지요. 그러나 저를 더욱 더 불편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배려는 이렇게 내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상대방에게 기준을 맞출 때 진정한 배려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배려를 하고 있나요? 혹시 최고로 배려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배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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