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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열정(enthusiasm, passion)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23 조회수562 추천수9 반대(0) 신고



2012년 나해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복음: 루카 9,23-26






마니피캇의 성모


보티첼리(Botticelli, Sandro) 작, (1485),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열정(enthusiasm, passion) >

           러시아 혁명 당시 가장 큰 죄인으로 여겨졌던 사람들은 공산화 혁명에 반대했던 지성인들이었다고 합니다. 보통의 죄수들은 시베리아의 칼바람이 부는 벌판이나 광산에서 언 땅을 파는 곡괭이질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치범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일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도소 마당 안에서 벽돌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교도소의 담이 바람을 막아주고 벽돌을 쌓는 일은 곡괭이질 하는 것보다 힘이 덜 든 데도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들이 벽돌을 다 쌓으면 그것을 다시 허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기껏 쌓아놓은 벽돌을 다시 허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쪽으로 옮기라고 합니다. 그들은 벽돌을 옮깁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시 벽돌을 쌓아올립니다. 다 쌓아올리면 그것을 다시 허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위치로 그것들을 다시 옮겨와 쌓아야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쉼 없이 그것을 해야 하는 고통은 삶의 희망을 잃게 만들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만들어서 삶의 의욕까지 잃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살 수 있을 때 참으로 열정을 지니고 살게 되지만, 그 무엇이 사라져버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사형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악법도 법이라며 사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삶에 의욕이 있었던 것일까요, 없어서 죽기만을 바랐던 것일까요? 그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신념이 있었기에 참으로 열정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열정이란 영어 단어를 찾아보면 ‘enthusiasm’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 ‘en - theos’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en’은 영어로 ‘in’, 안에라는 뜻이 있고, ‘theos’‘God’, 하느님입니다. 즉 하느님이 내 안에 있거나, 내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열정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만큼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없었음을 단어를 만들어 낼 때부터 알았던 것 같습니다.

또 열정이란 뜻을 나타내는 단어는 또한 ‘passion’이 있는데, 이는 열정이란 뜻과 함께 수난이란 뜻도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나타낼 때도 passion이란 단어를 씁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를 위한 열정적인 삶을 당신 수난의 고통으로 살아내셨습니다.

즉 이 두 단어를 연결시켜보면 열정을 가진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내 안에 모셔야 하는데 그 분을 지켜나가는 삶은 수난의 가시밭길이란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소돔지방에 살 때 자신의 집에 찾아온 두 천사를 잘 대접합니다. 그런데 소돔지방 사람들은 재미를 보겠다고 이 손님들을 내어 달라고 위협합니다. 롯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두 딸을 내어줄테니 이 손님들을 건들지 말아달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두 딸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신 안에 모신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희생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두 천사는 그들의 눈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 롯과 그 가족을 탈출시키고 소돔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립니다. 두 천사는 마치 성모님이 성령님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듯이, 성령과 성자를 뜻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열정적인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자신 안에 모신 그리스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순교 성인들은 당신들 안에 들어온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열정적인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일명 재건으로 불리는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부유한 외교인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그를 정성껏 공부시켰을 뿐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20세가 되던 해 석두는 종을 하나 거느리고 말에 올라 과거시험 길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저녁 한 주막에 들어가 묵고 있었는데, 그 때 어떤 천주교 신자를 만나 그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오랫동안 듣게 되었습니다. 젊은 석두는 그토록 유식한 교우의 말에 크게 감영을 받고 그의 주선으로 천주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아버지에게로 되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놀라 이상히 생각하자, 과거시험을 일찍 치르고 왔다고 말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늙으신 아버지는 거짓말임을 알아차리고 계속 캐물은 끝에 자기 아들이 되돌아온 근본동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렸으나 석두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천주교 교리책을 배우기에 열중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자기 부인을 영세 입교시키고 집안 몇 사람까지 개종시키었습니다.

한편 늙으신 아버지는 이 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큰 위기에 처해 있는지를 잘 알고, 또 천주교가 가문을 파괴하는 종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는 격분한 나머지 석두를 불러, “어느 양반집에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단 말이냐? 이제부터 다시는 천주교 교리공부는 못한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석두는 죽어야 한다면 죽을지언정 교리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하고 고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볏짚을 썰 때 쓰는 작두를 가져오게 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죽인다고 엄포해도 교리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목을 이 작두에 넣어라.”

제가 천주를 숭배하기 때문에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그렇다.”

그러면 목을 작두날 밑에 들이밀겠습니다.”

하인들은 감히 작두의 발판을 밟아 누르지 못했고 아버지는 소리쳐 울면서 다른 데로 가 버렸습니다.

석두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었습니다. 3년 동안을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진짜 벙어리처럼 지냈습니다. 이로 인해 온 집안 식구들은 걱정이 되어 그의 벙어리 병을 고치려고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해 보았으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석두는 부모가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서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말을 하다니!”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벙어리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엄금하셨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그 교리가 어떤 것이냐? 내가 좀 읽어 보게 그 책들을 가져오너라.”

그의 아버지는 책을 읽어 보고 나서 슬픔과 경탄으로 가득 차서 이왕 우리가 이 교리를 받을 바에야 몰래 믿지 말고 드러내 놓고 믿자꾸나.”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입교했고 가족도 모두 입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311일 다불뤼 주교가 체포되었을 때 석두는 자기의 영적 스승이요, 아버지인 주교를 따라 가기를 원해서 포졸들에게 자기가 주교의 제자라고 말하고 같이 죽기를 원했습니다.

다블뤼 주교가 처형될 때 망난이가 첫 번째 칼을 내리치고 나서 돈을 더 내라고 하며 오래 흥정을 하는 동안 황석두 루가는 위앵신부가 겁을 질려 울며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즉시 신부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이에 위앵 신부는 다시 힘을 얻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두 신부들의 순교에 이어 황석두 루가의 차례가 되자 용감하고 침착하고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표정으로 참수에 임하였으니 그의 나이 54세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3일이 지나서야 안주교와 함께 같은 곳에 매장되었다가 얼마 뒤 그의 아들이 와서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는데 오뉴월이었으나 시체는 하나도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인의 유해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초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불은 나무를 말려버리고 태워버립니다. 그러나 꽃이 꽃을 피우지 않으면 꽃이 아닌 것처럼, 초가 자신을 태우며 빛을 내지 않으면 더 이상 초로 살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은 자신을 소진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이 바로 삶인 것입니다.

 

손자선 토마스란 성인이 계십니다. 그는 당당하게 그리스도 신자임을 밝히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관원들이 그의 입을 벌리고 오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는 , 좋지?” 하고 놀려댔습니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습니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습니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습니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오른쪽, 왼쪽 손목의 살점을 뜯어냈습니다.

처형 된지 사흘 후에 유해를 거두러 갔으나 시체가 많아 찾지 못하다가 물어뜯은 손등을 보고 가려내니 목을 졸라 죽인 흔적이 분명했고 그 때까지 그의 시체는 조금도 썩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악취도 전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황석두 루카 순교자나 손자선 토마스 순교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분 다 돌아가신 이후 시체가 며칠 동안 방치되어 있었음에도 두 분 시신 모두 썩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죽인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열정으로 우리 자신을 태우는 삶으로만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결국 내가 지켜낸 그 분이 영원한 삶 자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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