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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의 여백(餘白) - 9.2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26 조회수357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2.9.26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잠언30,5-9 루카9,1-6

 

 

 

 

 



삶의 여백(餘白)

 

-여백의 사람들-

 

 

 

 

 



어제 어느 지인의 시낭송을 통해

우리 시대의 최고의 예술가라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란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해서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림 대신 시를 넣어

“시란 그것을 읽는 사람을 통해서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로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낭송하는 사람의 마음의 깊이에 따라 깊은 울림으로 와 닿는 시임을

새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림이나 시의 생명은 여백에 있습니다.

그림이나 시 같은 인생이 진정 여백을 지닌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삶의 여백을 잃고 참 팍팍하게 살아갑니다.

삶의 여백을 회복하여 ‘여백의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침묵과 고독의 여백을 사랑하여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찾았던

옛 사막의 수도승들은 바로 여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침 그 지인으로부터 본인이 저술한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옛 그림 속 여백을 걷다.’(김정숙 제노비아 지음)라는 책 제목에서

한 눈에 들어 온 여백이란 말이었습니다.

 


아, 까맣게 잊고 있던 참 반가운 단어 ‘여백’이었습니다.


여백이 상징하는바 얼마나 풍부한지요.

여백의 자유, 여백의 평화, 여백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 찾는 여백의 공간과 고요입니다.


여백의 하느님이요 여백의 관상입니다.

하늘의 여백이 있어 아름다운 산하입니다.

 

하느님의 여백이 있어 아름답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여백을 걷다’란 말을 ‘하느님 안을 걷다’로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삶의 여백을 누리며 여백의 사람들이 되어 살 수 있을지

그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자기를 잊고 무명(無名)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하기에 복잡하고 자유롭지 못한 삶입니다.

자기(ego)로 채울수록 여백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여백을 견딜 수 없어 자기로 가득 채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루가복음의 서두 말씀에서 떠오른 영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열두 제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꾼들에게 이미 자기는 없고 주님만이 현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비워 여백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며

바로 이 텅 빈 내적 공간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힘과 권능입니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얼마 전의 일도 생각이 납니다.

면담성사를 끝내고 간 자매의 이름을 알고 싶어 미사 봉투를 봤더니

자매님의 미사지향 대상인

딸과 사위와 외손자들과 죽은 아들의 이름만 있지

봉헌자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게 대부분 한국 어머니들의 모습니다.

이런 무명의 여백의 어머니들이 있기에 존속되는 세상입니다.


‘여백의 하느님’ 안에 ‘여백의 사람들’로 세상에 파견되는 제자들입니다.

 

 

 

 

 



둘째,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 받은

제자들의 모습에서 투명하게 들어나는 본질적 삶입니다.


하느님 말씀 선포와 치유로 요약되는 본질적 삶입니다.

 

본질에 충실할 때

삶은 단순해지고 내외적 여백의 공간도 서서히 확장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행할 때

저절로 뒤따르는 영육의 치유입니다.


잠언에서 다음 두 가지 간청의 기도 역시 본질적 삶을 드러냅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정직과 최소한의 의식주, 이보다 본질적인 것은 없습니다.

믿는 이들의 본질적 소원역시 이 둘뿐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불행은 제 본분을 망각한 거짓과 탐욕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무소유의 이상을 사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무소유가 아닌 무소유의, 무집착의 정신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소유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탐욕으로 인한 소유의 축적에서 시작하는 죄입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온전히 하느님 섭리에 의탁하여

소유가 아닌 충만한 존재의 삶을,

텅 빈 충만의 여백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모으고, 쌓고, 채우고, 축적하는 소유의 삶에서

나누고 버리고 비우는 존재의 삶으로 전환하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의 여백, 공간의 여백, 삶의 여백을 너무나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내적 자유와 평화를 잃어 생겨나는 온갖 영육의 질병입니다.

 

 

 

 

 


여백의 하느님이요 여백의 제자들입니다.

여백의 아름다움이요 여백의 평화요 여백의 자유입니다.


여백의 기쁨은 그대로 관상의 기쁨입니다.

 


진정 살 줄 아는 사람은 여백의 공간을 사랑하고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하루하루 하루의 여백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 여백의 공간에 어떻게 아름다운 하루를 그려 나갈까가

매일 우리에게 주어진 참 중요한 숙제입니다.

 


무명의 겸손으로 본질에 충실한 무소유의 삶일 때

비로소 아름다운 여백의 그림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여백의 미사를 통해

우리를 온통 비우시고

당신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당신의 여백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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