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27 조회수718 추천수18 반대(0) 신고

?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루카 9,7-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언자적 삶의 고통>

 

    학력위조 파문으로 한때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적이 있지요. 그 어떤 수단과 방

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주변인에서 벗어나 주류세력으로 편입하고픈 과도한 욕망의

실, 그 뒷맛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

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역,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게 되는 기본적인 욕구이겠지요.

 

    그러나 때로 조역으로서의 삶, 조력자로서의 삶, 주변인으로서의 삶, 선구자로서의 삶,

예언자로서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거론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감    독, 또는 PD, 또는 작가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감독이나 PD나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

에 얼굴 드러내는 것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

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렌즈

의 초점이 맞춰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이 확실히 뜨도록, 작품이 잘 나오도록, 무대 아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

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

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

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

았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 지녀야할 본연

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자신

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부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

틀    어 예언자치고 고통이나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    습니다. 예수님과 흡사한 방법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안정이나 평

화라는 단어는 꽤 낫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유다왕국의 멸망을 예고할 것을 숙제로 주셨

습니다. 그는 싫었지만, 괴로웠지만 계속해서 유다왕국의 끝장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

다. 국왕의 입장에서 쓴 소리만 계속해대는 예레미야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는 반국가적 언동을 서슴지 않던 요주의인물이었습니다.

 

    왕의 심복들은 이런 예레미야를 잡아 웅덩이에 가둡니다. 예레미야는 심연의 구덩이

로 내팽개쳐졌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따돌림 당하던 그는 얼마나 괴로

웠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나를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

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예레미야, 15, 10)

 

    세례자 요한의 삶 역시 대동소이했습니다. 왕의 치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것은 죽

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향해 쓴 소리를 수시로 남발한다는 것은 간땡이가 부

어도 단단히 부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

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