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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모님의 학교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05 조회수511 추천수3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101가지 묵주기도이야기
파트리시아 프락터 수녀 엮음 / 장말희 옮김

성모님의 학교

나는 다섯 아이를 홈스쿨링Home schooling으로 교육하고 있다. 13년 전, 셋째 아들을 낳고는 나팔관을 묶는 불임 시술을 했다. 그리고 일주 일도 채 안돼 내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 누구로부터도 불임 시술 문제에 대해 들은 바가 없긴 했지만. 남편에게 원상 복귀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남편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5년이 지나서야 남편은 찬성을 했고 나는 원상 복귀 시술을 한 다음 두 아이를 더 낳았다. 넷째 아이 를 가졌을 때, 열세 살이 된 큰아이에게 어릴 때 앓던 발작 증세가 다 시 찾아왔다. 처음에는 경미하게 시작되었고 이따금 찾아왔다. 그러나 곧 시간이 지나면서 심각해진 상황에서 넷째가 태어났고 일 년이 채 안 돼서 거의 매일 발작이 일어났다. 다섯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하 루에도 두세 번씩 발작을 겪어야 했다. 얼굴이 파래지면서 바닥에 쓰 러져 생명이 위협을 받을 정도로 경련이 심했다. 남편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해야 했지만, 성모님의 도우 심으로 아이의 발작은 남편이 집에 있을 때만 일어났다. 남편은 IBM에 서 일했는데 일주일에 60시간 근무를 하며 출장도 잦았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 직후 더 이상 홈스쿨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병원에 가야 했고 홈스쿨링을 하면 서 갓 태어난 아이를 돌봐야 했다. 큰아들이 언제 또 발작을 일으킬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그 모든 걸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나는 열심히 기도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서 승리의 모후(묵주기도의 모후로 알려진)이신 성모님께 기도하 며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기를 간청했다. 언젠가 재택근무를 하 게 되었던 남편은 홈스쿨링이 너무 벅차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학교로 돌려보내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승리의 모후께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시 기를 간구했다. 성모님께서 내 남편이 원하는 바를 알고 계시지만 나 는 학교 교육이 그 답이 아니라고 느꼈다. 성모님께서 그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홈스쿨링을 하던 엄마들이 내게 학교를 시작해 보라는 제의를 해 왔다. 나는 거절했다. 그 전 해에 홈 스쿨링을 하는 학부모들과 협조자들과의 회의에 참석했을 때,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고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 일들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학교 선생님에게서 홈스쿨링 학교를 시작해 보라는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도 할 수 없다고 거절했 다. 그런데 왠지 의아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속 기도했다. 2년 전 1월에 큰아들이 병원에 입원했다. 열여덟 시간 동안 발작이 계 속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와서 아이와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또다시 내게 제의를 해 왔을 때 나는 그것이 성모님의 응답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아이와 심각한 발작 증세를 겪고 있는 아들을 둔 엄마로서 홈스쿨링 학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하느님께서 도와 주시리라고 판단했다. 결국 사람들에게 홈스쿨링 학교를 시작하겠다고 알렸다. 함께 할 관 심 있는 사람들을 수소문했고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3월에 병원 에 있는 큰아들이 네 시간 동안 멈추지 않는 발작을 일으켰다. 다른 힘 든 일 외에도 늘어나는 의료비는 더 큰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일 년에 17,000달러가 넘는 비용이 들었다. 우리가 지불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 였다. 5월에 홈스쿨링을 하는 동료가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께 봉헌된 가 톨릭 홈스쿨링 회합을 열었다. 그곳에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많 은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홈스쿨링을 운영하는 사람 들이 나중에는 엄청난 부채를 떠 안게 된다는 결론을 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지아, 테네시, 앨라배마, 사우스카롤리나, 노스카롤리나, 플 로리다 등지에서 온 많은 가족들이 참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갚기는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안정되고 보니 빚은 모두 청 산되었고 약간의 돈이 남기까지 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일이 실제 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 일로 나는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일도 가능하게 해 주신다는 것 을 알았다. 그 후로 나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전부 알아 서 해 주실 테니까. 그리고 학교를 운영할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승리의 모후께 계속 기도하면서 승리의 모후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빅 토리(승리) 아카데미 학교에 연락을 하기로 했다. 가톨릭과 연계(홈스쿨링과 전통 학교 교육을 연계하여 일주일에 두 번은 학교에서, 세 번은 홈스쿨링으로 교육하는 방법)를 원했던 나는 성당이 가장 적합한 홈스쿨링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개인적인 이유로 성 가타리나 성당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 아서 그곳에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성당 몇 곳에 이야기를 해 봤 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당했다. 결국 두 군데가 남았다. 성 가타리 나 성당과 주님 변모 성당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내 가 다시 성 가타리나 성당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건 기막힌 운명의 장난이야!' 나는 주님 변모 성당의 교육 분과 위원회 모임에 참석했다. 본당의 지원은 반가웠지만 위원회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법적인 문제에 대해 많은 질문이 있었다. 나로서는 대답할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해 나가면서 성 가타리나 성당을 찾아가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들어 보기로 했다. 내가 그 본당 을 떠나 '성 베드로 사제 형제 수도회'의 라틴 전례 교회에 나간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도 3개월 동안 교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기대한 것 이상이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미리 준비한다고 해도 3개월이란 기간은 교사 채용과 학급 구성에 필요한 충분한 기간이 아니었다. 나 는 적어도 한 학기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주가 지나가도록 다른 소 식을 들을 수 없었다. 7월 말이 되었고 8월 중순에는 학교 문을 열기 로 되어 있었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7월 말의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말했다. 오늘이 그날이라고. 그날 소식을 듣지 못하면 개학은 다음해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개 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서 승리의 모후께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성모님, 들으셨겠지만 오늘 소식을 듣지 못하면 이제 끝이에요. 주님의 뜻이라면 여기서 끝내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않 다면 오늘 제가 소식을 듣게 해 주세요." 그날 용무가 있어서 성당 근처에 가게 되었다. 기왕 거기까지 갔으 니 책임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 남자는 밖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전에 그곳에 갔을 때 그는 언제나 복도 끝 그의 사무실에 있었고 그를 만나자면 비서와 약속을 해야 했다. 나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 책임 자를 밖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놀랍게도 그는 밖에 있었다. 다용도 건물의 페인트 작업을 지휘하 고 있었다. 강요하는 것으로 보이기 싫었지만 그날 나는 반드시 가부 간의 답을 들어야 했다. 자동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면서 만일 그 가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추 가적인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까지 드 는 가운데 그에게 갔을 때 그는 허가되었다고 말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놀라웠다. 그에게 다시 물었 다. 그는 그 건물을 사용해도 된다고 말했다. 교실 여섯 개, 육아실, 체육관, 그리고 필요하다면 운동장까지 사용할 수 있으며 전부 무료 라고 했다.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다. 그는 학교가 성장해 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동차로 돌아오면서 성모님께서 응답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을 것이라며 두려워했던 나에게 용기를 주시고 놀라운 방법 으로 나에게 알려 주셨다. 나는 거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성모님의 간 청을 했으면서도 막상 그렇게 빨리 또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응답 을 받고 충격에 빠져 들었다. 학교 문을 열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몇날 며칠 밤을 새우며 어려 운 작업을 했다. 개학을 9월로 미루기로 했다. 개학 2주 전에 어떤 여 성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무척 실망한 목소리였다. 다음해 9월에 같 은 형태의 학교를 열기로 했고 허가까지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런 사정을 몰랐다고 했고 함께 일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사용하는 가톨릭 교육과정을 그녀 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개신교 학교가 그런 교육과 정 없이도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다는 식으 로 말했다. 학교 이름도 바꿔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 계획대로 밀고 나가 기로 했다. 거의 한 달 동안 그녀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다시 허가를 받았으니 다음해에 그 건물에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월 - 수요일 에 이용하고 내가 화 - 목요일에 이용하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어 떠냐는 제의를 해 왔다. 나는 한 건물에서 두 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 는 말로 거절했다. 그녀는 끈질기게 계속 설득했지만 한 달 후 포기했 다. 학교 문을 열기 일주일 전, 남편과 나는 채무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법인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인 설립과 세무 보고로 1,500달러가 필요했고 그 외 곧 600달러가 필요했다. 우리에게는 지 불할 돈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절망에 빠졌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다. "성모님, 저희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저희 재정 상 태를 잘 아시잖아요. 성모님께서 이 학교를 원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렇게 되기를 원하신 건가요?" 이런 기도를 마쳤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느 학부형의 전화였는 데, 홍보 문제에 대해 물어온 것이었다. 나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학 교 문을 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고 그녀는 이유를 물었다. 내가 상 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학생이 전부 몇 명이냐고 물었다. 20명이라고 하자 그녀는 학생들이 법인 설립 비용을 각자 30달러씩 더 지불해야 하므로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기 금 모금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린 것이었다. 몇 분 전만 해도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순식간에 가능해진 것이다. 나는 학부형들을 긴급 소집해서 30 달러를 지불할 수 있는지 의사를 물었다. 두 학생이 나갔고 개학 첫날 세 학생이 들어왔다. 스무 명의 학생들과 첫 수업을 시작했다.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업 이 있었다. 5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반을 편성했다. 시작은 혼돈 그 자체였다. 교재도 없었고 교육과정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잘 운영해 나갔고 한 달이 못 돼 자리를 잡았 다. 10월에 나는 영원한 말씀의 시녀회 수도원으로 피정을 갔다.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학교 운영과 아픈 큰아들, 육아 등이 나를 서 서히 짓눌러 왔다. 거의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피정으로 육신의 휴 식은 물론 정신적인 향상과 집중력을 키울 수 있었다. 피정 중에 파티 마의 성모님 발현 축일을 맞이했다. 나는 파티마의 성모님께 의탁하 게 되었고 2년 전에 포르투갈을 방문하는 은총을 받았다. 나는 다시 일상을 계속할 준비가 되었다. 대주교님께 우리 학교에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시기를 청하는 편 지를 보냈다. 그분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고 기적의 메달 축일을 선 택하셨다. 승리의 모후와 과달루페의 성모님과 함께 기적의 메달 성 모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모님이 되셨다. 또한 성녀 엘리사벳 시 튼(가톨릭 교구 학교를 설립하신 분으로, 나는 이분의 교육과정을 채 택했다)을 알게 되었고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도 의탁하게 되었다. 대 주교님의 방문에 마음이 한껏 들떴다. 그분께서 오시는 날, 긴장된 가운데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도착에 맞 춰 맞으러 나가기 전에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열 명 정도가 와 있었다. 사무장이 다가와 신자들이 너무 적게 와서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더 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만 사실 얼마나 더 올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주님을 위해 준비했습니 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장의 말을 들으 셨죠. 사람들이 더 많이 와야 합니다." 그러자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진정해라. --- 내가 너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 순간 마음이 평화로워졌고 눈을 들어 보니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느님은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나는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지. 우리는 학습 외에도 전례력에 따라 생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학 생들이 전례에 따라 기념하고 생활하는 가운데 훌륭한 가톨릭 신자의 절제된 삶을 살도록, 그리고 학구적인 면에서 더욱 향상되도록 노력 했다. 또한 전문성 개발학과를 두었다. 학생들은 면담 기술, 자기소개 서 작성, 연설 원고 작성을 배우며, 철자법, 수학, 역사, 혹은 과학 등 전문 지식에 대한 질문에 5분 내로 답을 작성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 는 이것으로 지역 대회에 나가서 수년 동안 참가한 4개 공립학교와 경쟁을 했다. 그 아이들은 일주일에 5일 연습을 했고 우리 아이들은 일주일에 하루 연습했지만, 지역에서 우승을 했고 주대회에서 준우 승을 차지했다(우리는 1학년밖에 없었기 때문에 2학년 대회에는 출 전하지 못했다). 3월에 프랑스 루르드 성지를 공짜로 여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내 인생에 공짜로 받은 것이라곤 없었는데 성모님께서 내게 주셨던 것이 다. 다섯 명의 자매들과 신심이 매우 깊은 세 분의 신부님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은총이었다. 파리에 도착해서 루르드로 출발하기까지 세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한 신부님이 우리를 기적의 메달 성당으로 데려가셨다. 우리가 기적의 메달 성모님께 얼마나 넘치는 은총을 받 았는지를 그 신부님은 모르고 계셨다. 우리 일행은 루르드로 가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는 침 수 의식을 치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하며 보냈지만 즐거운 시간 도 가졌다. 이틀째 되는 날 신부님 한 분과 네 명의 자매들은 로마로 갔다. 그들이 가기 전, 신부님들은 새벽 여섯 시 특별 미사를 허가받 았다.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세 분의 신부님은 성 잔다르크 성당 에서 미사 집전을 하셨고 참으로 놀랍게도 그날 미사의 지향은 우리 빅토리 아카데미와 나를 위해 버쳐졌다. 몇 달 전에 내 친구가 나를 위해 생미사(살아 있는 사람을 위하여 드리는 미사) 한 대를 봉헌하고 싶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루르드로 출발하기 전에 신부님께서 미사 봉헌자 명단을 받아 가지고 오셨는데 거기 내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때 주 님께서 내게 은총을 넘치도록 내려 주셨던 것이다. 그해 여름, 성 가타리나 성당이 대주교님으로부터 가톨릭 학교를 시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책임자는 내가 그곳에서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교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곳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 베드로 사제 형제 수도회' 출신 이신 나의 영적 지도신부님께서 건물을 제공해 주셨다. 우리는 교실 14개, 커다란 체육관, 성당, 도서관을 갖게 되었고 신부님의 전적인 지원을 받았다. 첫해에는 대여료도 없었다. 주님께서 우리 학교를 축 복하심이 분명했다. 준비할 일이 무척 많았다. 건물은 거의 다시 칠해야 했다. 2주 동안 매일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정도 일을 해서 학교 시설을 마쳤다. 마 침내 그날이 왔고 우리는 문을 열었다. 장소가 학기 동안 변동이 있을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첫날까지 학생 등록을 할 수 없었다. 그건 교재 도, 충분한 교사도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짧은 시간내에 모든 것을 갖출 수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까지 오는 데 자동차로 평균 45분이 걸리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20명의 아이들과 시작하게 되었다. 일주 일 후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추가로 편성을 했고 한 달 후에는 유치부 를 만들었다. 10월에 총 47명이 되었다. 한 명이 나가면 두 명이 들어 왔다. 하느님의 배려를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봉사를 자원했고 어떤 이들은 경리 등 사무실 일 을 자원해서 해 주었다. 복사기와 캐비넷, 책상, 성화 등등의 물품도 기증받았다. 학교 일은 이제 공통체의 일이 되었다. 어느 관대한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 전집을 기증해 주었다. 내게 일어난 그 모든 기적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운 기적은 우리 큰아들이었다. 거의 4개월 동안 발작 증세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은 제도공이 되기 위해 기술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습 장애와 약 물 치료에서 오는 손 떨림 증상이 있지만 학급에서 잘하는 편에 속하 며 쓰기 시험에서 90점을 받았다. 아들은 6년 동안 통제 불능의 발작 을 겪고 나서 이제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우리 학생들은 1월에 있을 전문지식 경쟁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 면서 주대회와 전국대회에서 가능한 우승하기를 희망한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은 어느 곳에서나 성모님과 묵주기도의 힘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의 관대하심과 그분의 기적은 어디서도 만나게 될 것이다. 많 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분의 은총을 넘치게 받았다. 참으로 보잘 것없는 내가 선택받았던 것이다. - 조지아 액워스에서 아네트 B. 휴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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