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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체조배 7. 묵상에서 관상으로
작성자김은정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08 조회수732 추천수2 반대(0) 신고
 
7. 묵상에서 관상으로 
이 부분은 제 기도의 변화를 제가 개인적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아마도 모두에게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제가 저의 과정을 좀더 세밀하게 추적해 보았어요.
또 마침 기도를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자신의 기도를 제게 들려주어서
지나간 저의 시간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게 해주었어요.
편의상 숫자로 표현할게요.
 
준비
이 시간은 몸과 마음을 기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었어요.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성당에 갔고요,
예외적으로 이 과정에서 신비를 먼저 맛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식대로 생각해보면, 너무 깊이 상처받은 사람들은 쉽게 하느님께
못 가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이 과정을 먼저 주셔서 위로하시지요.
천천히 당신 손을 잡을 수 있게요.
저도 실제로 이 시간 동안에 특별한 체험들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기도가 진행되어서가 아니라 기도를 계속할 수 있게 저를 잡아주는
그런 일들이었어요.
시간이 흘러서야 저를 알게 되니, 저는 그러한 체험들을 해야만이 하느님께
갈수 있었던 단단한 사람이었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어요.
 
첫 번째 과정
위에서 쓰여진 대로 육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어요.
아마도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보낸 시간들이죠.
이 시간들 동안에 마음이 비워지는 시기였고요.
감실의 어떤 느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요,
저는 주로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었어요.
감실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것이 느껴졌지요.
저는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부터는 묵상하고자 하는 말씀에 집중하고 있으면 마치
대답처럼 마음속에서 소리가 올라왔어요.
이렇게 계속해서 묻고 답하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말씀이 올라오면 응답이라고 믿어서 다음 성서로 나아갔어요.
 
그런데 워낙 초기이다 보니 올라온 말씀이 전부였고요.
거기서 더 진행이 안되었어요.
이렇게 계속해서 묻고 답하는 그런 시간이었는데
말씀이 올라오면 응답이라고 믿어서 다음 과정을 못 간거예요.
그리고 첫 번째 과정에서 금방 2과정으로 성장한 게 아니에요.
몇 년의 시간들이 지나갔지요.
 
두 번째 과정
이렇게 몇 년을 지내다가 기도 중에 갑자기 올라온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제가 빠르게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체험했어요.
묵상해서 올라온 그 말씀들이 마치 길을 가듯이 뭔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생각이 정리되고 깨달아지는 것이었어요
생각이 정리되면서 정리된 것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어요.
기도해서 올라온 그 말씀으로 더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성령께서 직접 제 기도를 이끄시는 것일까요?
그렇게 의문이 드니, 그 다음부터는 첫 번째 단계에서 응답으로 올라온 말씀들을
이어서 묵상해 보았어요.
그랬더니 그 응답으로 올라온 말씀들이 마치 생각이 빛처럼 깨달아지는 것이었어요.
마치 눈에 보여지는 어떤 길을 보고 있는 것처럼요.
어느 순간에 빛과 같이 한줄기 생각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줄기 생각이 빠르게 어딘가로 갑니다.
이렇게 한줄기 생각을 쫓아갈 수 있게끔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깨달았어요.
처음엔 이 부분도 저의 의지가 길을 찾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곧 성령의 이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령은 일관성 있고 분명한 주제로 저를 이끄셨거든요.
명료하고 분명한 한줄기 생각이 길을 가듯이 저를 안내했어요.
그것은 어느 순간에 마치 빛을 보는 것처럼
생각들이,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지식이나 경험을 토대로 순식간에
제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눈에 보여요.
마치 눈을 감고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 동안에 우리 몸이
마치 각성이 되어서 생각들을 추려내는 것처럼요.
제 안에서는 그 묵상하는 말씀에 맞는 자료들을
성령께서는 다 모아서 필요한 부분에 배치를 시키고,
그시기에 제게 맞는 메시지로 정리를 해서 제 마음으로 내보내시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어요.
제가 알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제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진실들로 재 구성이 되면서
제안에서 차곡차곡 보여지는 시기였어요.
그 깨달음들이 마치 문을 여는 고리가 되어서, 그 문고리를 열면
그 안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보여지는 그런 신비였어요.
그리고 보편적인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이 이렇게 제 안에서 이끌어진 깨달음과
일치한다는 놀라운 체험의 시기였고요,
산발적으로 배우고 들었던 어떤 이야기라도 성령께서는 놀랍도록 심오한 진리로
이끌어 내주심을 여기에서 보게 되었지요.
이렇게 두 번째 과정에는 그 동안 하느님에 대해 배운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정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자신을 어떤 큰 매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큰 매장 안에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는 내 자원의 박스들을 차곡히 정리해서
통로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되어요.
내 것이 깨끗이 정리되어서 분명한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설수 있도록.
그렇게 깨닫고 나니 이 두 번째 과정부터는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책도 안보게 되지요.
제가 느끼기엔 지식이 많을수록 이시기가 길어지는 것 같거든요.
성령께서는 제가 아는 것을 다 풀어주셔야 하고 머리도 정리해주셔야 하니까요.
여기까지 온 제 친구는 제게 묻습니다.
‘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그냥 기다려, 자기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지 않으면 못 들어가지.
그것은 시간이야, 시간이 지나야 하지,
너의 생각과 정신과 몸에 충분히 하느님의 질서와 조화가 스며들어서 넘치면
자연스럽게 기도가 네 안으로 향하게 될 거야.’
 
대부분 두 번째 과정까지만 가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순식간에 성서의 모든 말씀이 조명되어지니,
참 놀라운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자신의 어떤 자원도 사용되어지니 의지적으로
자기도 갈수 있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도 여러 번의 시도와 관찰로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나 자신도 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저도 제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가 있거든요.
두 번째 과정에서는, 나와 성령의 구분은 사실 모호한 구석이 있지만,
제 체험으로 제가 기도를 이끌고 있을 때에는 제 생각들 사이를 천천히
추리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생각들을 이리저리 찾아냅니다.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이끄심은 아주 빠르게 속도를 가지고 진행이 되요,
좀더 주의를 기울여서 점검해보면,
쉽게 구분이 될 만큼 명료한 깨달음을 주시지요.
마치 한줄기 빛이 비추어지듯이 생각이 나를 안내하거든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분명한 주제로 연결을 해주십니다.
 
두 번째 과정으로 기도가 바뀔 때에는 정말 기도하고 있다고 믿었거든요.
제 안에서 어떤 질서가 잡히는 것 같았지요.
이 두 번째 시간이 제 자신에게 하느님을 각인시키는 기간이었다고 생각되었어요.
아마도 두 번째의 시기에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질서와 조화와 일치를 배운 게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치관이 심어지는 시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제 안의 모든 자료들을 통해서 교회의 일원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으니까요.
또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다음 세 번째의 과정이 진행되었을 때에서야
저는 이 두 번째 과정이 나에게로 향하는 중간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저는 저에게로 향하기 전에 제 안에 하느님의 질서가 필요함을 알았고요,
그것은 제가 꼭 알아야 하는, 저를 판단해줄 어떤 가치관이 있어야 함을
알게 된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보낸 시간도 몇 년입니다.
특별히 지도자가 없어서이기도 했고요.
제 머리도 정화를 거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시기에는 이렇게 기도가 일취월장하는 것처럼 보여도
가만이 들여다보면 내 안에 있는 지식의 자원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시각으로
다시 정립이 되고 있는 시간들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와 가슴을 정리하고 나서야 저는 제 안에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저의 길을 따라 나설 수가 있었다고 지금도 생각하지요.
 
여기 세 번째 과정은
묵상을 통한 깨달음이 자신의 내면을 두드리는 시기입니다.
두 번째 과정 묵상을 오래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생각이 빠르게
자기 자신에게 향합니다.
이 부분에서도 시간이 필요했어요.
금방 기도가 진행되지 않았거든요.
어느 순간에 묵상의 깨달음이 자신을 건드리게 되는 시기인데요,
여기에서도 한동안 두 번째 단계에서 기도가 끝나도
언제나 이렇게 자신이 건드려지지 않았고요,
어떤 때는 자연스럽게 제 안으로 들어가 지는데 어느 때엔 열심히 해도
알듯 말듯하다가 끝난 적도 많았어요.
그 차이를 찾느라 또 요리저리 궁리를 많이 했지요.
그러다가 알아냈어요.
두 번째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해서 뽑아낸 주제들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기도했을 때는
저의 내면으로 들어가 지질 않았어요.
여기서도 생각하지 않고 기다려야 했어요.
교회의 가르침으로 이끌린 부분에선 지식적인 저의 자원도 많이 들어가니
생각이 살며시 고개를 들지요.
이런 생각들을 또다시 멈추어야 하지요.
 
세 번째 과정에는 제 의지로는 갈수 없었어요.
이 세 번째에서는 제가 보는 모든 것들이,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제가 듣는 모든 말씀들이 저를 돌아보게 했고요,
그 안에 저와 함께 예수님께서 계셨지요.
제 안에서 말씀이 살아서 아프게 저를 건드리더군요.
그리고 제가 살아오면서 제 안에 담겨 있는 제 상처들이 끄집어 올라와서
제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 체로 살아왔던 모든 시간들이 제 안에서
예수님과의 함께하는 의미로 재생되었지요.
사람들과 용서를 하고, 화해를 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다시 만들어졌지요.
여기서 비로서 이렇게 기도의 주제가 나와 예수님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충실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또 여기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받게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사실 두 번째 과정이 생략되어도 여기 세 번째에서 자신을 통해서 교회의 질서와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깨닫는 것들이 모두에게 같이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알게 되고요.
그래서 하느님 일에 대한 일관된 어떤 안목을 받게 되지요.
통찰이 생깁니다.
어떤 흐름이 보이거든요.
그리고 지식과 경험을 넘어서는 분명한 깨달음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저의 인격이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생활과 전례가 함께 간다고 생각했어요.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모두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데
좀더 깊이 묵상해보면 기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 삶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시기에는 제가 보기엔 언제 어느 때에나 묵상과 기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랜 시간의 기도로 마음과 몸이 깨어있는 시간이 되지요.
기도를 해야만 갈수 있었던 마음 밭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집니
.
그렇지만 언제나 어느 때에나 기도가 가능하게 되어도,
이때에도 지속적으로 앉아있지 않으면 기도의 마음 밭은 쉽게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지요.
실천하지 않아도 이 마음 밭은 쉽게 사라집니다.
고백성사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입니다.
죄에 막혀도 마음 밭이 사라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니까요.
이렇게 모두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어서 더 가야 함을 알게 하지요.
저는 성장하고 있으면서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지니고 있는 저의 모습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거든요.
굳센 믿음으로 가기 위해 저 자신의 몸과 마음과 믿음과 실천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시간이었고요,
지금도 그렇지요.
이 시기의 사람들은 실제로 기도 속에서,
생활 속에서 서로가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네 번째 과정
제가 보기에 여기서 오는 일치와,
(1,2,3) 과정에서 오는 일치는 조금 다르게 생각됩니다.
이전 과정에서의 일치는 기도 속에서 가능하지만, 생활은 아직 더 가야할길이 있지요.
여기까지 온다면 자신과의 투쟁을 끝내고 굳센 믿음을 받으시리라고 여겨집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온전한 순종을 받으셨겠지요.
치열한 자기투쟁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오는 자기 인식과 실천의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 네 번째에서의 일치는 생활과 믿음과 하나가 되는 일치라고.
마음과 몸과 믿음과 생활이 온전히 주님과 일치를 이루는 시간이 되겠지요.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좋은 도구가 되어있겠지요.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실천하기를 바라시니까요.
그것이 또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시는 것이겠지요.
저도 주님의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이 과정으로 갈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풀어보면, 보통 저는 처음 말씀을 가지고 기도로 들어가서
맨 처음에 올라온 말씀을 듣고서, (1과정)
그 말씀에 다시 집중할 때에 보통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재 정립의 과정을 거쳐서 (2과정)
그렇게 깨닫게 되는 진리가 제 마음으로 들어와서
제 개인적인 고유한 어떤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지요. (3과정)
이 세 번째에서 기도의 주제들이 저와 예수님과 긴밀한 연결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기도 속에서 생활 속에서 드러나지요.
그 곳에서 지난 과거 속의 나의 상처를 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날 기다리시는지,
지금 내 현실 속의 문제인지,
아니면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곳인지,
언제나 기도의 끝에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거든요.
저는 이렇게 경험이 되면서 한 단계씩 나아가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서게 되었을 때서야 기도를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그러기 전까지는,
제가 예수님을 만나지도 않고서 엄밀하게 말한다면 제가 이해했다 고서
기도를 끝냈던 것이지요.
세 번째 과정을 할 시간이 와서야 비로소 기도를 깨달았지요.
그리고 기도가 바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루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제가 기도를 통해서 올라온 말씀에 다시 머무르고 물을 때에,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제 삶 속에서 당신의 뜻을 제게 알려주시고,
제 안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알아졌어요.
그러면서 저는 비로소 예수님 안에서 무엇이 되기 시작했고요,
제 안에서도 예수님이 저의 무엇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네 번째에선 온전한 의탁으로
주님의 충실하고도 신뢰받는 자의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좋은 도구로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관계가 조명되어야만이 제 생활 속에서 기도가 실천할 힘이 생기는 것인데
마치 그 올라온 깨달음이 최종 목적지인 마냥 기도를 끝냈던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쓰는 것은 저에게는 이것이 마치 패턴처럼 순서대로 가더라고요.
보통 이 순서대로 기도가 일관성 있게 진행된다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실제로 해보면 지금도 늘 세 번째 과정까지 잘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과정까지는 잘 되다가도 세 번째 과정은 잘 진행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잘 기다리지 않아서이기도 했고요,
또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어요.
두 번째 과정에서 충분하게 밥이 뜸이 들듯이 기도도 익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익어서 넘쳐서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기도는 제 의지만으론 안되니까요.
기도는 나와 예수님과, 또는 하느님과의 교통이니까요.
이때에도 이미 성령께서는 저를 언제나 예수님께로 안내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기도 속에서 실제로 기다려서 성령을 따라 나설 수 있을 때까지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요. 이렇게 기도가 시간이 흘러야만이 갈수 있는 길처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마치 한 과정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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